2023년 3월 26일 일요일

중용자잠 5-自箴

<원문>

箴曰此節。卽愼獨君子存心養性之極功。非通論天下人之性情也。何以知其然也。上節曰君子戒愼。曰君子愼獨。下節曰君子中庸。曰君子時中。此節承上接下。而忽論天下人之性情。必無是理。其爲愼獨君子之成德人何疑乎。


<직역>

경계해(箴) 말한(曰)다. 이(此) 절(節)은 곧(卽) 신독(愼獨)하는 군자(君子)의 존심양성(存心養性)의(之) 극진한(極) 공로(功)이다. 통론(通論)인 천하(天下) 사람(人)의(之) 성정(性情)이 아니(非)다(也). 어찌하여(何以) 그것(其)이 그러함(然)을 아(知)는가(也). 윗(上) 절(節)에서 말하기(曰)를 ‘군자(君子)는 계신(戒愼)한다.’ 말하기(曰)를 ‘군자(君子)는 신독(愼獨)한다.’ 아랫(下) 절(節)에서 말하기(曰)를 ‘군자(君子)는 중용(中庸)한다.’ 말하기(曰)를 ‘군자(君子)는 시중(時中)한다.’ 이(此) 절(節)은 위(上)를 잇(承)고 아래(接)를 잇(接)는다. 그러나(而) 갑자기(忽) 천하(天下) 사람(人)의(之) 성정(性情)을 논하(論)면 반드시(必) 옳(是)은 이치(理)가 없(無)다. 그것(其)을 신독(愼獨)하는 군자(君子)의(之) 덕이 있는 사람(德人)을 이룸(成)으로 한(爲)다. 어찌(何) 의심하(疑)는가(乎).


<해석>

경계해 말한다. 이 절(節)은 곧 신독(愼獨)하는 군자(君子)의 존심양성(存心養性)의 극진한 공로(功)이다. 흔히 말하는 천하(天下) 사람의 성정(性情)이 아니다. 어찌하여 그러함을 아는가. 윗 절(節)에서 말하기를 ‘군자(君子)는 계신(戒愼)한다.’ 말하기를 ‘군자(君子)는 신독(愼獨)한다.’ 아랫 절(節)에서 말하기를 ‘군자(君子)는 중용(中庸)한다.’ 말하기를 ‘군자(君子)는 시중(時中)한다.’ 이 절(節)은 위를 잇고 아래를 잇는다. 그러나 갑자기 천하(天下) 사람의 성정(性情)을 논하면 반드시 옳은 이치가 아니다. 그것을 신독(愼獨)하는 군자(君子)가 덕(德)이 있는 사람이 된다고 함을 어찌 의심하는가.




<원문>

〇何以明其然也。愼獨者誠也。下章曰惟天下至誠。爲能立天下之大本。知天地之化育。夫焉有所倚。其所謂立天下之大本者。致中和也。其所謂知天地之化育者。天地位而萬物育也。其所謂 夫焉有所倚者。贊美中和之德也。此章下章。上下照應。毫髮不差。愼獨之爲至誠。至誠之爲愼獨。旣然無疑。則未發之中已發之和。惟愼獨者當之。不能愼獨者。方其未發之時。心術先已邪辟。及其旣發之後。行事又復偏陂。安得以中和二字許之於此人乎。況致中和則天地位焉。萬物育焉。明中和二字爲聖人之極功。安得爲衆人之所與乎。若云已發有善惡。未發無善惡。則是衆人雖不能皆和。未嘗不皆中。雖不能致和。未嘗不致中。小人君子。其將分據位育之功。而可通乎。


<직역>

어찌하여(何以) 그것(其)이 그러하(然)다고 밝히(明)겠는가(也). 신독(愼獨)이라는 것(者)은 성(誠)이다(也). 아랫(下) 장(章)에서 말하기(曰)를 ‘오직(惟) 천하(天下)의 지극히(至) 성(誠)만이 능히(能) 천하(天下)의(之) 대본(大本)을 세우(立)고 천지(天地)의(之) 화육(化育)을 알(知)도록 한(爲)다. 아아(夫) 어찌(焉) 치우친(倚) 바(所)가 있(有)겠는가.’ 그(其) 소위(所謂) ‘천하(天下)의(之) 대본(大本)을 세움(立)’이라는 것(者)은 치중화(致中和)이다(也). 그(其) 소위(所謂) ‘천지(天地)의(之) 화육(化育)을 안(知)다’는 것(者)은 천지(天地)가 자리잡(位)으면서(而) 만물(萬物)이 자람(育)이다(也). 그(其) 소위(所謂) ‘아아(夫) 어찌(焉) 치우친(倚) 바(所)가 있(有)겠는가’라는 것(者)은 중화(中和)의(之) 덕(德)을 찬미(贊美)함이다(也). 이(此) 장(章)과 아랫(下) 장(章)에서 위아래(上下)가 조응(照應)한다. 호발(毫髮)도 어긋나(差)지 않(不)는다. 신독(愼獨) 그것(之)을 지극한(至) 성(誠)으로 하(爲)고 지극한(至) 성(誠) 그것(之)을 신독(愼獨)으로 한(爲)다. 이미(旣) 그러하(然)면 무의(無疑)하다. 곧(則) 미발(未發)의(之) 중(中)과 이발(已發)의(之) 화(和)는 오직(惟) 신독(愼獨)하는 사람(者)만이 그것(之)에 마땅하(當)다. 신독(愼獨)할 수 없(不能)는 사람(者)은 모두(方) 그(其) 미발(未發)의(之) 때(時)에 심술(心術)이 먼저(先) 이미(已) 사사스럽고 편벽되(邪辟)니 마침내(及其) 이미(旣) 발(發)의(之) 뒤(後)의 행사(行事) 또한(又) 치우치(偏)고 기울어짐(陂)을 거듭한(復)다. 중화(中和) 두(二) 글자(字)로써(以) 이 사람들(此人)에게(於) 그것(之)을 허락할(許) 수 있(安得)겠는가(乎). 하물며(況) 치중화(致中和)하면 곧(則) 천지(天地)가 자리잡(位)고(焉) 만물(萬物)이 자란(育)다(焉). 중화(中和) 두(二) 글자(字)를 성인(聖人)의(之) 극진한(極) 공로(功)로 함(爲)이 분명하(明)다. 중인(衆人)의(之) 주어진 바(所與)로 할(爲) 수 있(安得)겠는가(乎). 만약(若) 이르기(云)를 이발(已發)은 선악(善惡)이 있(有)고 미발(未發)은 선악(善惡)이 없(無)다면 곧(則) 이(是) 중인들(衆人)이 비록(雖) 모두(皆) 화(和)할 수 없(不能)어도 과연(未嘗不) 모두(皆) 중(中)이다. 비록(雖) 화(和)에 이를(致) 수 없(不能)어도 과연(未嘗不) 중(中)에 이른(致)다. 소인(小人)과 군자(君子)가 그(其) 장차(將) 위육(位育)의(之) 공로(功)를 나누(分)어 맡(據)는다. 그렇다면(而) 가히(可) 통하(通)겠는가(乎).


<해석>

어찌하여 그렇다고 밝히겠는가. 신독(愼獨)이라는 것은 정성스럽게 함(誠)이다. 아랫 장(章)에서 말하기를 '천하(天下)의 지극히 정성스럽게 함(誠)만이 천하(天下)의 큰 근본(本)을 세울 수 있고 천지(天地)의 만들어 기름(化育)을 알 수 있도록 한다. 아아 어찌 치우친 바가 있겠는가. 그 이른바 '천하(天下)의 큰 근본(本)을 세움'이라는 것은 중화(中和)에 이름(致)이다. 그 이른바 '천지(天地)의 만들어 기름(化育)을 안다'는 것은 천지(天地)가 자리잡으면서 만물(萬物)이 자라는 것이다. 그 이른바 '아아 어찌 치우친 바가 있겠는가'라는 것은 중화(中和)의 덕(德)을 칭찬하는 것이다. 이 장(章)과 아랫 장(章)에서 위아래가 대응한다. 가느다란 털도 어긋나지 않는다. 신독(愼獨)을 지극히 정성스럽게 함(誠)으로 하고 지극히 정성스럽게 함(誠)을 신독(愼獨)으로 하면 이미 의심할 것이 없으니 쏘아지(發)지 않은 중(中)과 이미 쏘아진(發) 화(和)는 오직 신독(愼獨)하는 사람에게만 마땅하다. 신독(愼獨)할 수 없는 사람은 모두 쏘아지(發)지 않을 때 심술이 이미 사사스럽고 편벽되니 마침내 쏘아진(發) 뒤의 행사(行事) 또한 치우치고 기울어지기를 반복한다. 중화(中和) 두 글자를 이 사람들에게 허락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중화(中和)에 이르(致)면 곧 천지(天地)가 자리잡고 만물(萬物)이 자란다. 중화(中和) 두 글자를 성인(聖人)의 극진한 공로로 했음이 분명하다. 보통 사람에게 주어진 바로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이르기를 이미 쏘아진 것(發)은 선악(善惡)이 있고 쏘아지(發)지 않은 것은 선악(善惡)이 없다고 하면 곧 보통 사람들이 비록 모두 화(和)할 수 없어도 과연 모두 중(中)이고 비록 화(和)에 이를 수 없어도 과연 중(中)에 이른다. 소인(小人)과 군자(君子)가 장차 자리잡고 자람(位育)의 공로를 나누어 맡는다면 통할 수 있겠는가.


<해설>

惟天下至誠。爲能立天下之大本。知天地之化育。夫焉有所倚의 원문 : 唯天下至誠。爲能經綸天下之大經。立天下之大本。知天地之化育。夫焉有所倚。




<원문>

〇愼獨之能致中和何也。未發者喜怒哀樂之未發。非心知思慮之未發。當此之時。小心翼翼。昭事上帝。常若神明照臨屋漏。戒愼恐懼。惟恐有過。矯激之行。偏倚之情。惟恐有犯。惟恐有萌。持其心至平。處其心至正。以待外物之至。斯豈非天下之至中乎。當此之時。見可喜則喜。見可怒則怒。當哀而哀。當樂而樂。由其有愼獨之潛功。故遇事而發。無不中節。斯豈非天下之至和乎。


<직역>

신독(愼獨)의(之) 치중화(致中和)를 할 수 있음(能)은 어째서(何)인가(也). 미발(未發)이라는 것(者)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의(之) 미발(未發)이다. 심지사려(心知思慮)의(之) 미발(未發)이 아니(非)다. 마땅히(當) 이것(此)의(之) 때(時)에 소심익익(小心翼翼)하게 상제(上帝)를 소사(昭事)한다. 항상(常) 신명(神明)이 가장 구석진 곳(屋漏)을 굽어봄(照臨)과 같(若)으니 계신(戒愼)하고 공구(恐懼)한다. 오직(惟) 허물(過)이 있음(有)을 두려워한(恐)다. 교격(矯激)의(之) 행동(行)이나 편의(偏倚)의(之) 정(情)이 오직(惟) 범함(犯)이 있음(有)을 두려워하(恐)고 오직(惟) 싹(萌)이 있음(有)을 두려워한(恐)다. 그(其) 마음(心)의 지극히(至) 공평함(平)을 가진(持)다. 그(其) 마음(心)의 지극히(至) 바름(正)에 거주한(處)다. 그것으로써(以) 외물(外物)의(之) 다가감(至)을 가진(待)다. 이(斯) 어찌(豈) 천하(天下)의(之) 지극한(至) 중(中)이 아니(非)겠는가(乎). 마땅히(當) 이것(此)의(之) 때(時)에 기뻐할(喜)만 함(可)을 보(見)면 곧(則) 기뻐하(喜)고 성낼(怒)만 함(可)을 보(見)면 곧(則) 성내(怒)고 마땅히(當) 슬퍼함(哀)에(而) 슬퍼하(哀)고 마땅히(當) 즐거워함(樂)에(而) 즐거워한(樂)다. 그것(其)은 신독(愼獨)의(之) 숨겨진(潛) 공로(功)가 있음(有)을 말미암(由)는다. 그러므로(故) 일(事)과 조우해(遇)서(而) 발(發)하면 알맞음(節)에 부합하(中)지 않음(不)이 없(無)다. 이(斯) 어찌(豈) 천하(天下)의(之) 지극한(至) 화(和)가 아니(非)겠는가(乎).


<해석>

신독(愼獨)이 중화(中和)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은 어째서인가. 미발(未發)이라는 것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의 미발(未發)이지 심지사려(心志思慮)의 미발(未發)이 아니다. 마땅히 이때 엄숙하고 경건하게 상제(上帝)를 밝게 섬김이 항상 신이 가장 구석진 곳을 굽어봄과 같으니 계신(戒愼)하고 공구(恐懼)한다. 허물이 있을까만을 두려워하고 지나치게 과격한 행동과 기울어져 있는 정(情)을 범할까만을 두려워하고 싹이 있을까만을 두려워한다. 그 마음(心)의 지극히 공평함(平)과 지극히 바름(正)을 얻어서 바깥의 것으로 다가간다. 이 어찌 천하(天下)의 지극한 중(中)이 아니겠는가. 마땅히 이때 기뻐할(喜)만 할 때 기뻐하(喜)고 성낼(怒)만 할 때 성내고 마땅히 슬퍼할(哀) 때 슬퍼하(哀)고 마땅히 즐거워할(樂) 때 즐거워한(樂)다. 그것은 신독(愼獨)의 숨겨진 공로를 말미암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事)과 갑자기 만나서 쏘아지(發)면 알맞음(節)에 부합하(中)지 않는 것이 없다. 이 어찌 천하(天下)의 지극한 화(和)가 아니겠는가.




<원문>

〇衆人則不然。方其未發之時。謂目之所不睹而無所戒愼。 謂耳之所不聞而無所恐懼。謂隱之不可現而不信天道。謂微之不可顯而不畏天命。思遇一事。欲作矯激之行。以欺一世。思畫一計。任遂偏倚之情。以利一身。當此之時。其所以爲喜怒哀樂者。或失之過。或失之不及。或失之偏。或失之有倚。由是觀之。致中非愼獨不能也。致和非愼獨不能也。中庸之道。非愼獨不能也。今以未發之中。已發之和。欲爲天下人之通論。可乎不可乎。


<직역>

중인(衆人)은 곧(則) 그렇지 아니하(不然)다. 지금(方) 그(其) 미발(未發)의(之) 때(時)에 ‘눈(目)의(之) 보(睹)지 못하(不)는 바(所)라서(而) 계신(戒愼)하는 바(所)가 없(無)다’라 이른(謂)다. ‘귀(耳)의(之) 듣(聞)지 못하(不)는 바(所)라서(而) 공구(恐懼)하는 바(所)가 없(無)다’라 이른(謂)다. ‘은(隱)의(之) 나타날(現) 수 없음(不可)에(而) 천도(天道)를 불신(不信)한다’라 이른(謂)다. ‘미(微)의(之) 드러날(顯) 수 없음(不可)에(而) 천명(天命)을 두려워하지 않(不畏)는다’라 이른(謂)다. 한가지(一) 일(事)을 만남(遇)을 생각하(思)면 교격(矯激)의(之) 행동(行)을 짓(作)고자 한(欲)다. 그것으로써(以) 한 시대(一世)를 속인(欺)다. 한가지 꾀(一計)를 꾀함(畫)을 생각하(思)면 멋대로(任) 편의(偏倚)의(之) 정(情)을 따른(遂)다. 그것으로써(以) 일신(一身)만을 이롭게 한(利)다. 마땅히(當) 이것(此)의(之) 때(時)에 그(其)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되(爲)는 방법(所以)이라는 것(者)은 혹(或) 그것(之)에서 벗어남(失)이 지나치(過)고 혹(或) 그것(之)에서 벗어남(失)이 미치지 못하(不及)고 혹(或) 그것(之)에서 벗어남(失)이 치우치(偏)고 혹(或) 그것(之)에서 벗어남(失)에 기울어짐(倚)이 있(有)다. 이것(是)을 말미암(由)아 그것(之)을 보(觀)면 중(中)에 이름(致)은 신독(愼獨)이 아닐(非) 수 없(不能)다(也). 화(和)에 이름(致)은 신독(愼獨)이 아닐(非) 수 없(不能)다(也). 중용(中庸)의(之) 도(道)는 신독(愼獨)이 아닐(非) 수 없(不能)다(也). 지금(今)은 미발(未發)의(之) 중(中)과 이발(已發)의(之) 화(和)로써(以) 천하(天下) 사람(人)의(之) 통론(通論)으로 하(爲)고자 한(欲)다. 옳(可)은가(乎) 옳지 않(不可)은가(乎).


<해석>

일반 사람은 그렇지 않다. 지금 그 쏘아지(發)지 않은 때에 ‘눈(目)으로 보지 못하니 계신(戒愼)하는 바가 없다’고 이르고 ‘귀(耳)로 듣지 못하니 공구(恐懼)하는 바가 없다’고 이르고 ‘희미한 것(隱)이 나타날 수 없다고 천도(天道)를 믿지 않는다’고 이르고 ‘자세한 것(微)이 드러날 수 없다고 천명(天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이른다. 한가지 일을 만나면 지나치게 과격한 행동을 짓어서 한 시대를 속이고 꾀를 내면 멋대로 기울어져 있는 정(情)을 따라서 자기만을 이롭게 한다. 마땅히 이때 그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되는 방법은 벗어나는 정도가 지나치기도 하고 부족하기도 하고 치우치기도 하고 기울어지기도 한다. 이를 말미암아 보면 중(中)에 이름은 신독(愼獨)이 아닐 수 없고 화(和)에 이름도 신독(愼獨)이 아닐 수 없고 중용(酒用)의 도(道)는 신독(愼獨)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쏘아지(發)지 않은 중(中)과 이미 쏘아진(發) 화(和)로 천하(天下)사람의 일반적 견해로 하고자 한다. 옳은가 옳지 않은가.


 


<원문>

〇致中和之能位育何也。致中和者至誠也。至誠者天道也。至誠之人。與天合德則上可治天。下可治地。故南正重司天。北正黎司地。及堯之時。羲伯司天。和伯司地。以正曆象。以建圭臬。於是百度具擧。庶績成熙。山林川澤。各有官守。艸木鳥獸。時養時殺。此所謂能盡人性。能盡物性也。原其所本。豈非愼獨之誠。有以致此也乎。


<직역>

치중화(致中和)의(之) 위육(位育)을 할 수 있음(能)은 어째서(何)인가(也). 치중화(致中和)라는 것(者)은 지극한(至) 성(誠)이다(也). 지극한(至) 성(誠)이라는 것(者)은 천도(天道)이다(也). 지극한(至) 성(誠)의(之) 사람(人)이 하늘(天)과(與) 덕(德)을 맞추(合)면 곧(則) 위(上)로는 하늘(天)을 다스릴(治) 수 있(可)고 아래(下)로는 땅(地)을 다스릴(治) 수 있(可)다. 그러므로(故) 남정(南正)인 중(重)이 하늘(天)을 맡(司)았고 북정(北正)인 여(黎)가 땅(地)을 맡(司)았다. 요임금(堯)의(之) 시대(時)에 미치(及)면 희백(羲伯)이 하늘(天)을 맡(司)았고 화백(和伯)이 땅(地)을 맡(司)았다. 그것으로써(以) 역상(曆象)을 바로잡(正)고 그것으로써(以) 규얼(圭臬)을 세웠(建)다. 이(是)에(於) 백도(百度)가 자세히(具) 바로잡혔(擧)다. 서적(庶績)이 빛남(熙)을 이뤘(成)다. 산림천택(山林川澤)에 각각(各) 관수(官守)가 있(有)다. 초목(艸木)과 조수(鳥獸)를 때맞춰(時) 기르(養)고 때맞춰(時) 죽인(殺)다. 이것(此)이 소위(所謂) 능히(能) 인성(人性)을 다하(盡)고 능히(能) 물성(物性)을 다함(盡)이다(也). 원래(原) 그(其) 근거하(本)는 바(所)가 어찌(豈) 신독(愼獨)의(之) 성(誠)이 아니(非)면 이(此)에 이를(致) 수 있(有以)겠는가(也乎).


<해석>

중화(中和)에 이르러 자리잡고 자랄 수 있다는 것은 어째서인가. 중화(中和)에 이른다는 것은 지극히 정성스럽게 함(誠)이다. 지극히 정성스럽게 함(誠)이라는 것은 천도(天道)이다. 지극히 정성스럽게 하(誠)는 사람이 하늘(天)과 덕(德)을 맞추면 곧 위로는 하늘(天)을 다스릴 수 있고 아래로는 땅(地)을 다스릴 수 있다. 그러므로 남정(南正)으로 있던 중(重)이 하늘(天)을 맡았고 북정(北正)으로 있던 여(黎)가 땅(地)을 맡았다. 요임금(堯)의 시대에 이르면 희백(羲伯)이 하늘(天)을 맡고 화백(和伯)이 땅(地)을 맡아서 천문 현상 관측(曆象)을 바로잡고 표준(圭臬)을 세우니 온갖 법률과 제도(百度)가 자세히 바로잡히고 여러 공적들이 빛나고 산과 숲과 내와 못(山林川澤)에 각각 관리가 있어 풀과 나무(草木)와 새와 짐승(鳥獸)을 때맞춰 기르고 때맞춰 죽였다. 이것이 이른바 인성(人性)을 다할 수 있고 물성(物性)을 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원래 그 근거하는 바가 어찌 신독(愼獨)의 정성스럽게 함(誠)이 아니면 이에 이를 수 있겠는가.



 

<원문>

〇樂記云動己而天地應焉。四時和焉。星辰理焉。萬民育焉。此夸語也。其謂之大本者何也。先儒謂人主一心。爲萬化之本。愼獨之功。能於未發之時。立其中正。以基位育之功。其非天下之大本乎。其謂之達道者何也。喜怒哀樂。發而中節。則內之處父子昆弟。外之處君臣朋友。無往而不行吾之仁。無適而不行吾之義。沛然四達。莫之夭閼。豈非天下之達道乎。


<직역>

「악기(樂記)」에서 이르기(云)를 ‘몸(己)을 움직이(動)니(而) 천지(天地)가 응하(應)도다(焉). 사시(四時)가 화(和)하도다(焉). 성신(星辰)이 다스려지(理)로다(焉). 만민(萬民)이 자라(育)도다(焉).’ 이것(此)은 자랑하(夸)는 말씀(語)이다(也). 그것(其)이 그것(之)을 대본(大本)이라 이르(謂)는 것(者)은 어째서(何)인가(也). 선유(先儒)가 ‘인주(人主)의 일심(一心)을 만화(萬化)의(之) 근본(本)으로 한(爲)다’라 일렀(謂)다. 신독(愼獨)의(之) 공로(功)는 능히(能) 미발(未發)의(之) 때(時)에(於) 그(其) 중정(中正)을 세운(立)다. 그것으로써(以) 위육(位育)의(之) 공로(功)를 준비한(基)다. 그것(其)이 천하(天下)의(之) 대본(大本)이 아니(非)겠는가(乎). 그것(其)이 그것(之)을 달도(達道)라 이르(謂)는 것(者)은 어째서(何)인가(也).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발(發)하면서(而) 알맞음(節)에 부합하(中)면 곧(則) 안(內)의(之) 부자(父子)와 곤제(昆弟)를 보살피(處)고 밖(外)의(之) 군신(君臣)과 붕우(朋友)를 보살핀(處)다. 나아가(往)면서(而) 나(吾)의(之) 인(仁)을 행하(行)지 않음(不)이 없(無)고 목적지로 향하(適)면서(而) 나(吾)의(之) 의(義)를 행하(行)지 않음(不)이 없(無)다. 매우 세차게(沛然) 사방으로 통하(四達)고 막지요알(莫之夭閼)하다. 어찌(豈) 천하(天下)의(之) 달도(達道)가 아니(非)겠는가(乎).


<해석>

「악기(樂記)」에서 이르기를 ‘몸을 움직이니 천지(天地)가 응하고 봄여름가을겨울이 조화롭고 별이 다스려지고 모든 백성이 자라도다.’ 이것은 자랑하는 말씀이다. 그것을 큰 근본(本)이라 이르는 것은 어째서인가. 선대의 유학자가 ‘군주의 한 마음을 끝없는 변화의 근본으로 한다’라고 일렀다. 신독(愼獨)의 공로(功)는 쏘아지(發)지 않은 때에는 그 중정(中正)을 세워서 자리잡고 자라는 공로(功)를 준비한다. 그것이 천하(天下)의 큰 근본(本)이 아니겠는가. 그것을 마땅한 도(道)라 이르는 것은 어째서인가.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쏘아지(發)면서 알맞음(節)에 부합하(中)면 곧 안으로는 부자(父子)와 형제(昆弟)를 보살피고 밖으로는 군신(君臣)과 벗(朋友)을 보살핀다. 나아가면서 나의 인(仁)을 행하(行)지 않음이 없고 목적지로 향하면서 나의 의(義)를 행하(行)지 않음이 없다. 매우 세차게 사방으로 통하고 장애가 하나도 없다. 어찌 천하(天下)의 마땅한 도(道)가 아니겠는가.




<원문>

〇昔在乾隆甲辰之夏。込友曠菴李德操。與余論中庸大義。毫分縷析。靡有遺感。獨於未發已發之說。常曰此節不可曉。今三十年矣。若使曠菴得聞余今日之論。必犁然相入矣。九原難作。何嗟及矣。


<직역>

옛날(昔) 건륭갑진(乾隆甲辰)의(之) 여름(夏)에 있(在)어 벗(友)인 광암(曠菴)이나 이덕조(李德操)와(與) 내(余)가 모여(込)서 『중용(中庸)』의 대의(大義)를 논했(論)다. 호분누석(毫分縷析)했다. 깨달음(感)을 빠뜨림(遺)이 없(靡有)었다. 홀로(獨) 미발(未發)과 이발(已發)의(之) 말씀(說)에서(於) 항상(常) 말하기(曰)를 이(此) 절(節)은 이해할(曉) 수 없(不可)다. 이제(今) 삼십(三十)년(年)이다(矣). 만약(若) 광암(曠菴)으로 하여금(使) 내(余) 금일(今日)의(之) 견해(論)를 득문(得聞)하게 했다면 반드시(必) 확실히(犁然) 서로(相) 받아들였(入)을 것이다(矣). 구원(九原)에서 일어나(作)기 어려(難)우니 아아(嗟) 어찌(何) 미치(及)겠는가(矣).


<해석>

옛날 1784년 여름에 벗인 광암(曠菴)이나 이덕조(李德操)와 내가 모여서 『중용(中庸)』의 대략적인 뜻을 논했다. 아주 잘게 나누어도 깨닫지 못함이 없었는데 미발(未發)과 이발(已發)의 말씀만은 항상 이 절(節)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제 삼십년이나 지났는데 만약 광암(曠菴)으로 하여금 내 지금의 견해를 듣게 했다면 분명 서로 인정했을 것이다. 묘지에서 일어나기 어려우니 아아 어찌 미치겠는가.


<해설> 

이 절(節)은 오랫동안 논쟁거리가 된 듯하다. 정약용 선생님은 1762년생이고 『중용자잠(中庸自箴)』의 완성시기는 1814년으로 알려져 있다. 23살에 토론을 하고 딱 30년 만에 생각을 정리하게 된 것이다. 




<원문>

朱子曰蓋天命之性。純粹至善。而具於人心者。其體用之全。本皆如此。不以聖愚而有加損也。然靜而不知所以存之。則天理昧而大本有所不立矣。動而不知所以節之。則人欲肆而達道有所不行矣。惟君子自其不睹不聞之前。所以戒謹恐懼者。愈嚴愈敬。以至於無一毫之偏倚。而守之常不失焉。則爲有以致其中。而大本之立。日以益固矣。尤於隱微幽獨之際。而所以謹其善惡之幾者。愈精愈密。以至於無一毫之差謬。而行之每不違焉。則爲有以致其和。而達道之行。日以益廣矣。見或問


<직역>

주자(朱子)가 말하기(曰)를 “모든(蓋) 천명지성(天命之性)은 순수(純粹)하고 지선(至善)하다. 그리고(而) 사람(人)의 마음(心)에서(於) 갖춘(具) 것(者)은 그(其) 근본(體)과 작용(用)의(之) 온전함(全)이다. 원래(本) 모두(皆)가 이와 같(如此)이다. 성인(聖)과 어리석은 사람(愚)을 생각해(以)도(而) 더함(加)과 덜함(損)이 있(有)지 않(不)다(也). 그러나(然) 고요해(靜)도(而) 그것(之)을 보존하(存)는 방법(所以)을 알지 못하(不知)면 곧(則) 천리(天理)가 어두워지(昧)면서(而) 대본(大本)에 세워지(立)지 못하(不)는 바(所)가 있(有)다(矣). 움직여(動)도(而) 그것(之)을 알맞게 하(節)는 방법(所以)을 알지 못하(不知)면 곧(則) 인욕(人欲)이 방자해지(肆)면서(而) 달도(達道)에 행해지(行)지 못하(不)는 바(所)가 있(有)다(矣). 오직(惟) 군자(君子)의 그(其) 보(睹)지 못하(不)고 듣(聞)지 못함(不)의(之) 전(前)부터(自) 경계하(戒)고 삼가(謹)고 공구(恐懼)하는 방법(所以)이라는 것(者)은 더욱(愈) 엄하(嚴)고 더욱(愈) 공경하(敬)여 작은 털(一毫)의(之) 기울어짐(偏倚)이 없(無)고(而) 그것(之)을 지킴(守)이 항상(常) 잃지 않(不失)을 정도가 되었(以至於)다(焉). 곧(則) 그(其) 중(中)에 이를(致) 수 있(有以)게 되(爲)고(而) 대본(大本)의(之) 세워짐(立)이 나날이(日) 그것으로써(以) 방비(固)를 더한(益)다(矣). 은미(隱微)하고 조용히 홀로 있음(幽獨)의(之) 때(際)에(於) 적절하(尤)고(而) 그(其) 선악(善惡)의(之) 조짐(幾)을 삼가(謹)는 방법(所以)이라는 것(者)은 더욱(愈) 정통하(精)고 더욱(愈) 자세하(密)여 작은 털(一毫)의(之) 다르(差)고 그르침(謬)이 없(無)고(而) 그것(之)을 행동(行)이 늘(每) 어긋나(違)지 않(不)을 정도가 되었(以至於)다(焉). 곧(則) 그(其) 화(和)에 이를(致) 수 있(有以)게 되(爲)고(而) 달도(達道)의(之) 행해짐(行)이 나날이(日) 그것으로써(以) 넓이(廣)를 더한(益)다(矣).” [『혹문(或問)』에 보인(見)다.]


<해석>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모든 천명지성(天命之性)은 사사로운 욕심이 없(純粹)고 지극히 선(善)하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心)에서 근본과 작용(體用) 모두를 갖췄다. 원래 모두가 이와 같다. 성인(聖)과 어리석은 사람(愚)을 생각해도 더하거나 덜 것이 없다. 그러나 고요하더라도 보존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 곧 천리(天理)가 어두워지면서 큰 근본(本)이 세워지지 못하는 바가 있다. 움직여도 알맞게 하(節)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 곧 인욕(人欲)이 방자해지면서 마땅한 도(道)가 행해지(行)지 못하는 바가 있다. 군자(君子)만의 보(睹)지 못하고 듣(聞)지 못하기 전부터 경계하(戒)고 삼가(謹)고 공구(恐懼)하는 방법이라는 것은 더욱 엄하고 더욱 공경하(敬)여 아주 조금도 기울어져 있지 않고 항상 지킨다는 것이다. 곧 그 중(中)에 이를 수 있게 되고 큰 근본(本)의 세워짐이 나날이 단단해진다. 어둡(隱)고 작(微)고 조용히 혼자인 때에 적절하고 그 선악(善惡)의 조짐을 삼가는 방법이라는 것은 더욱 정통하고 더욱 자세하여 아주 조금의 다르고 그르침도 없고 행동이 늘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곧 그 화(和)에 이를 수 있게 되고 마땅한 도(道)의 행해짐이 나날이 넓어진다.” [『혹문(或問)』에 보인다.]

 



<원문>

〇箴曰朱子於此。亦以中和出於愼獨。特於章句。無此意思。故俗儒不能知耳。今之學者。表章朱子此說。以爲指南。庶不迷矣。但天命之性。雖聖愚同得。而中和二字。乃成德之美名。必用力推致而後。乃爲吾有。豈可於不用力之前。先有中和之德。釘著人心者乎。通論聖愚則百藤千葛。棼然以興。卒無以摞理也。所服膺者。惟君子以下。


<직역>

경계해(箴) 말한(曰)다. 주자(朱子)는 여기(此)에서(於) 또한(亦) 중화(中和)로써(以) 신독(愼獨)에서(於) 나온(出)다. 다만(特) 『장구(章句)』에(於) 이(此) 의사(意思)가 없(無)다. 그러므로(故) 변변치 못한 선비(俗儒)가 알(知) 수 없(不能)었을 따름이다(耳). 지금(今)의(之) 학자(學者)가 주자(朱子)의 이(此) 말씀(說)을 표장(表章)한다. 지침(指南)으로 여긴(以爲)다. 일반 사람들(庶)도 헷갈리(迷)지 않(不)는다(矣). 다만(但) 천명지성(天命之性)은 비록(雖) 성인(聖)과 어리석은 사람(愚)이 함께(同) 얻(得)는다. 그러나(而) 중화(中和) 두(二) 글자(字)는 다만(乃) 성덕(成德)의(之) 미명(美名)이니 반드시(必) 용력(用力)과 미루(推)어 지극히 함(致) 이후(而後)에 비로소(乃) 나(吾)에게 있음(有)으로 한(爲)다. 어찌(豈) 가히(可) 용력(用力)하지 않음(不)의(之) 전(前)에(於) 먼저(先) 중화(中和)의(之) 덕(德)이 있(有)고 사람(人)의 마음(心)에 못을 박(釘)아 붙인(著) 것(者)이겠는가(乎). 통론(通論)은 성인(聖)과 어리석은 사람(愚)이 곧(則) 백(百)의 등나무(藤)와 천(千)의 칡(葛)이 얽힌(棼) 듯(然) 그것으로써(以) 생겨난(興)다. 마침내(卒) 정돈하(摞)여 다스릴(理) 수 없(無以)다(也). 마음에 새기(服膺)는 바(所)라는 것(者)은 오직(惟) 군자(君子) 이하(以下)이다.


<해석>

경계해 말한다. 주자(朱子)는 여기에서도 중화(中和)가 신독(愼獨)에서 나온다고 했다. 다만 『장구(章句)』에 이 의미가 없어서 변변치 못한 선비가 알 수 없었을 따름이다. 지금의 학자가 주자(朱子)의 이 말씀을 널리 알리고 지침으로 여기니 일반 사람들도 헷갈리지 않는다. 다만 천명지성(天命之性)은 성인(聖)과 어리석은 사람(愚)이 함께 얻더라도 중화(中和) 두 글자는 덕(德)을 이룬 명예이니 반드시 힘을 들이고 미루어 지극히 한 이후에야 비로소 나에게 있다고 하는 것이다. 어찌 힘을 들이기 전에 중화(中和)의 덕(德)이 있고 사람의 마음(心)에 못을 박아 붙였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일반적인 견해는 성인(聖)과 어리석은 사람(愚)이 수 많은 등나무와 칡이 얽힌 듯 생겨나니 마침내 정돈하여 다스릴 수 없다. 마음에 새기는 바라는 것은 군자(君子)이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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