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禮記本王天下至民弗從。皆與此節上連。
<직역>
『예기(禮記)』 판본(本)에서 ‘천하(天下)에서 임금 노릇한(王)다’에서 ‘백성(民)이 따르(從)지 않(弗)는다’까지(至) 모두(皆) 이(此) 절(節)과(與) 위(上)를 연결한(連)다.
<해석>
『예기(禮記)』 판본에서 ‘천하(天下)에서 임금 노릇한다’에서 ‘백성(民)이 따르지 않는다’까지 모두 이 절(節)과 위를 연결한다.
<원문>
論語子曰夏禮吾能言之。杞不足徵也。殷禮吾能言之。宋不足徵也。文獻不足故也。足則吾能徵之矣。
<직역>
『논어(論語)』에서 선생님(子)께서 말씀하시기(曰)를 “하나라(夏) 예(禮)는 내(吾)가 그것(之)을 말할(言) 수 있(能)다. 기나라(杞)는 증거(徵)가 모자라(不足)다(也). 은나라(殷) 예(禮)는 내(吾)가 그것(之)을 말할(言) 수 있(能)다. 송나라(宋)는 증거(徵)가 모자라(不足)다(也). 문헌(文獻)이 모자란(不足) 까닭(故)이다(也). 충분하(足)면 곧(則) 나(吾)는 그것(之)을 증명할(徵) 수 있(能)으리라(矣).”
<해석>
『논어(論語)』에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라(夏) 예(禮)는 내가 말할 수 있는데 기나라(杞)는 증거가 모자라다. 은나라(殷) 예(禮)는 내가 말할 수 있는데 송나라(宋)는 증거가 모자라다. 옛날의 제도나 문물을 아는 데에 증거가 되는 자료나 기록이 모자란 까닭이다. 충분하면 곧 나는 그것을 증명할 수 있으리라.”
<원문>
〇案此謂夏商之禮。孔子知之。而杞宋反無所傳。故不足以證孔子所知也。
<직역>
상고건대(案) 이것(此)을 하나라(夏)와 상나라(商)의(之) 예(禮)라 이른(謂)다. 공자(孔子)는 그것(之)을 알았(知)다. 그러나(而) 기나라(杞)와 송나라(宋)는 반대로(反) 후세에 전하여 내려오는 바(所傳)가 없(無)었다. 그러므로(故) 증거(證)로써(以) 공자(孔子)가 아는 바(所知)가 모자라(不足)다(也).
<해석>
상고건대 이것을 하나라(夏)와 상나라(商)의 예(禮)라 이른다. 공자(孔子)는 그것을 알았다. 그러나 기나라(杞)와 송나라(宋)는 반대로 후세에 전하여 내려오는 바가 없었으므로 증거로 공자(孔子)가 확인한 것이 모자랐다.
<원문>
禮運子曰我欲觀夏道。是故之杞而不足徵也。吾得夏時焉。我欲觀殷道。是故之宋而不足徵也。吾得坤乾焉。
<직역>
「예운(禮運)」에서 선생님(子)께서 말씀하시기(曰)를 “나(我)는 하나라(夏)의 도(道)를 보(觀)고자 했(欲)다. 이(是) 까닭(故)에 기나라(杞)에 갔(之)는데(而) 증거(徵)가 모자랐(不足)다(也). 나(吾)는 『하시(夏時)』를 얻(得)었다(焉). 나(我)는 은나라(殷)의 도(道)를 보(觀)고자 했(欲)다. 이(是) 까닭(故)에 송나라(宋)에 갔(之)는데(而) 증거(徵)가 모자랐(不足)다(也). 나(吾)는 『곤건(坤乾)』을 얻(得)었다(焉).”
<해석>
「예운(禮運)」에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하나라(夏)의 도(道)를 보고자 했기에 기나라(杞)에 갔는데 증거가 모자랐지만 『하시(夏時)』만은 얻었다. 나는 은나라(殷)의 도(道)를 보고자 했기에 송나라(宋)에 갔는데 증거가 모자랐지만 『곤건(坤乾)』만은 얻었다.
<원문>
〇案不足徵者。謂彼邦之所存。不足以證吾之所聞所學也。
<직역>
상고건대(案) 증거(徵)가 모자라(不足)다는 것(者)은 저(彼) 나라(邦)의(之) 아직 남아 있는 것(所存)을 이른(謂)다. 증거(證)로써(以) 나(吾)의(之) 들(聞)은 것(所)과 배운(學) 것(所)이 모자라(不足)다(也).
<해석>
상고건대 증거가 모자라다는 것은 저 나라의 아직 남아 있는 것을 이른다. 내가 증거로 듣고 배운 것이 모자라다.
<원문>
箴曰將言君子之道有徵有考。下文云徵諸庶民。考諸三王。故先引孔子之言。借一徵字。以明斯道有證其義。若曰孔子於禮。雖能言能學。苟其無徵則亦不敢從。至於斯道。有徵有考。不可不從也。
<직역>
경계해(箴) 말한(曰)다. 장차(將) 군자(君子)의(之) 도(道)를 말하(言)면 증거(徵)가 있(有)고 검증(考)이 있(有)다. [아랫(下) 글(文)에서 이르기(云)를 “서민(庶民)에게(諸)를 증명하(徵)고 삼왕(三王)에게(諸) 검증했(考)다.”] 그러므로(故) 먼저(先) 공자(孔子)의(之) 말씀(言)을 인용했(引)다. 하나(一)의 징(徵)이라는 글자(字)를 빌려(借) 이(斯) 도(道)를 밝힘(明)으로써(以) 그(其) 의미(義)를 증명함(證)이 있(有)다. 만약(若) 말하기(曰)를 “공자(孔子)가 예(禮)에 대해(於) 비록(雖) 말할(言) 수 있(能)고 배울(學) 수 있(能)어도 진실로(苟) 그(其) 증거(徵)가 없(無)다면 곧(則) 또한(亦) 따름(從)을 감히 하지 못한(不敢)다.” 이(斯) 도(道)에(於) 이르(至)면 증거(徵)가 있(有)고 검증(考)이 있(有)다. 따르지 않(不從)을 수 없(不可)다(也).
<해석>
경계해 말한다. 군자(君子)의 도(道)를 말하려면 증거가 있고 검증이 있어야 한다. [아랫 글에서 이르기를 “서민(庶民)에게 증명하고 우왕과 탕왕과 문왕에게 검증했다.”] 그러므로 먼저 공자(孔子)의 말씀을 인용했다. 하나의 징(徵)이라는 글자를 빌려 이 도(道)를 밝혀서 그 의미를 증명했다. 만약 “공자(孔子)가 예(禮)에 대해 비록 말할 수 있고 배울 수 있어도 진실로 그 증거가 없다면 곧 또한 감히 따를 수 없다”고 말해도 이 도(道)에 이르면 증거가 있고 검증이 있는 것이니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원문>
〇夏禮殷禮。雖承上禮樂之文。所重在徵字。不在禮字。當別爲一章。爲下節之起峰也。大學中庸。皆文斷處意續。意斷處文續。
<직역>
하나라(夏)의 예(禮)와 은나라(殷)의 예(禮)가 비록(雖) 위(上) 예악(禮樂)의(之) 글(文)을 연결되(承)나 중요한(重) 바(所)는 징(徵)이라는 글자(字)에 있(在)다. 예(禮)라는 글자(字)에 있지 않(不在)다. 마땅히(當) 따로(別) 한(一) 장(章)으로 한(爲)다. 아랫(下) 절(節)의(之) 첫(起) 봉우리(峰)로 한(爲)다(也).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은 모두(皆) 글(文)이 끊어지(斷)는 곳(處)에서 뜻(意)이 이어진(續)다. 뜻(意)이 끊어지(斷)는 곳(處)에서 글(文)이 이어진(續)다.
<해석>
하나라(夏)의 예(禮)와 은나라(殷)의 예(禮)가 비록 위에 있는 예악(禮樂)이라는 글과 연결되나 중요한 바는 징(徵)이라는 글자에 있지 예(禮)라는 글자에 있지 않으니 따로 한 장(章)으로 하여 아랫 절(節)의 시작점으로 해야 한다.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은 모두 글이 끊어지는 곳에서 뜻이 이어지고 뜻이 끊어지는 곳에서 글이 이어진다.
<원문>
王天下至百世以俟聖人而不惑。知人也。皆當與此節合而爲一。
<직역>
‘천하(天下)에서 임금 노릇한(王)다’에서 ‘여러(百) 대를 이으(世)나(以) 성인(聖人)을 기다리(俟)면서(而) 미혹되지 않(不惑)는다’까지(至)는 사람(人)을 앎(知)이다(也). 모두(皆) 마땅히(當) 이(此) 절(節)과(與) 합하(合)면서(而) 하나(一)로 한(爲)다.
<해석>
‘천하(天下)에서 임금 노릇한다’에서 ‘여러 대를 이으나 성인(聖人)을 기다리면서 미혹되지 않는다’까지는 사람(人)을 앎(知)이다. 모두 이 절(節)과 합하여 하나로 해야 한다.
<원문>
箴曰王天下者。議禮而無罪。制度而無罪。考文而無罪。此之謂三重。此之謂寡過也。
<직역>
경계해(箴) 말한(曰)다. 천하(天下)에서 임금 노릇한(王)다는 것(者)은 예(禮)를 의논하(議)면서(而) 실수(罪)가 없음(無)이다. 법도(度)를 만들(制)면서(而) 실수(罪)가 없음(無)이다. 책의 이름을 바로잡(考文)으면서(而) 실수(罪)가 없음(無)이다. 이것(此)의(之) 이름(謂)이 세가지(三) 중요한 것(重)이다. 이것(此)의(之) 이름(謂)이 ‘허물(過)이 적(寡)다’이다(也).
<해석>
경계해 말한다. 천하(天下)에서 임금 노릇한다는 것은 예(禮)를 의논하면서 실수가 없고 법도를 만들면서 실수 없고 책의 이름을 바로잡(考文)으면서 실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세가지 중요한 것이나 ‘허물이 적다’고 이른다.
<원문>
〇禮度文者。有形有數之物。而苟其無徵。民不信從。況道者無形無質之物。苟爲無徵。孔子豈敢以私言刱立其道。以冀其信從乎。但此道有本有徵。又可考可建可質可俟。確然無疑。爲天下萬民所共由之大道。將謂之無徵乎。本諸身徵諸庶民。不可曰無徵也。將謂之不尊乎。孔子雖不尊。三王尊天地尊鬼神尊。百世之聖人皆尊。不可曰不尊也。民於此道焉。敢不信而從之乎。
<직역>
예(禮)와 도(度)와 문(文)이라는 것(者)은 모양(形)이 있(有)고 갯수(數)가 있음(有)의(之) 물(物)이다. 그러나(而) 진실로(苟) 그(其) 증거(徵)가 없(無)다면 백성(民)이 믿고 따라 좇(信從)지 않(不)는다. 하물며(況) 도(道)라는 것(者)은 모양(形)이 없(無)고 내용(質)도 없음(無)의(之) 물(物)이다. 진실로(苟) 증거(徵)가 없(無)다고 하(爲)면 공자(孔子)가 어찌 감히(豈敢) 사사로운(私) 말(言)로써(以) 그(其) 도(道)를 세움(立)을 시작하(刱)고 그것으로써(以) 그(其) 믿고 따라 좇음(信從)을 바라(冀)겠는가(乎). 다만(但) 이(此) 도(道)는 근본(本)이 있(有)고 증거(徵)가 있(有)다. 또한(又) 검증할(考) 수 있(可)고 마련할(建) 수 있(可)고 이룰(質) 수 있(可)고 바랄(俟) 수 있(可)다. 의심(疑)이 없음(無)이 아주 정확하(確然)다. 천하(天下) 모든 백성(萬民)이 함께(共) 말미암음(由)의(之) 큰(大) 도(道)인 바(所)로 한(爲)다. 장차(將) 그것(之)을 증거(徵)가 없(無)다고 이르(謂)겠는가(乎). 신(身)에게(諸) 근거하(本)고 서민(庶民)에게(諸)을 증명한(徵)다. 증거(徵)가 없(無)다고 말할(曰) 수 없(不可)다(也). 장차(將) 그것(之)을 높이(尊)지 않(不)았다고 이르(謂)겠는가(乎). 공자(孔子)가 비록(雖) 높이(尊)지 않(不)았더라도 삼왕(三王)이 높이(尊)고 천지(天地)가 높이(尊)고 귀신(鬼神)이 높이(尊)고 백세(百世)의(之) 성인(聖人)이 모두(皆) 높인(尊)다. 높이(尊)지 않(不)았다고 말할(曰) 수 없(不可)다(也). 백성(民)이 이(此) 도(道)에서(於) 어찌(焉) 감히(敢) 그것(之)을 믿(信)으면서(而) 좇(從)지 않(不)겠는가(乎).
<해석>
예(禮)와 도(度)와 문(文)이라는 것은 모양이 있고 개수가 있는 것이나 진실로 그 증거가 없다면 백성(民)이 믿고 따라 좇지 않는다. 하물며 도(道)라는 것은 모양이 없고 내용도 없는 것이니 진실로 증거가 없다고 하면 공자(孔子)가 어찌 감히 사사로운 말로 그 도(道)를 세우고 믿고 따라 좇기를 바라겠는가. 다만 이 도(道)는 근본이 있고 증거가 있다. 또한 검증할 수 있고 마련할 수 있고 이룰 수 있고 바랄 수 있다. 의심할 것 없이 아주 정확하다. 천하(天下) 모든 백성이 함께 따르는 큰 도(道)로 하니 장차 그것을 증거가 없다고 이르겠는가. 자신(身)에게 근거하고 서민(庶民)에게 증명하니 증거가 없다고 말할 수 없으니 장차 그것을 높이지 않았다고 이르겠는가. 공자(孔子)가 비록 높이지 않았더라도 우왕과 탕왕과 문왕이 높이고 천지(天地)가 높이고 귀신(鬼神)이 높인다. 오랜 세대의 성인들(聖人)이 모두 높이니 높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백성(民)이 이 도(道)에서 어찌 감히 그것을 믿으면서 좇지 않겠는가.
<원문>
〇本諸身者。道生於性。性在於身。以天命之性。擴而充之。可以爲孝弟忠信仁義禮智。仁義禮智。非由外鑠我也。此本諸身也。天下之人。其性皆同。故能盡其性者。能盡人之性。其一一皆受天命。可知也。此徵諸庶民也。禹湯文武。皆本之天命。以敎斯民。此考諸三王而不謬也。建立此道。則天地萬物。莫不歸順。此建諸天地而不悖也。百神承命。輔佑化育。萬物一本。於此可驗。此質諸鬼神而無疑也。千世在前。百世在後。前聖後聖。其揆必同。此百世以俟聖人而不惑也。豈可曰無徵。豈可曰不尊乎。道者何道也。天命之爲性。率性之謂道。率性者。中和之有常也。
<직역>
신(身)에게(諸) 근거한(本)다는 것(者)은 도(道)가 성(性)에서(於) 이뤄짐(生)이다. 성(性)은 신(身)에게(於) 있(在)다. 천명지성(天命之性)으로써(以) 넓히(擴)면서(而) 그것(之)을 채운(充)다. 효제충신(孝弟忠信)과 인의예지(仁義禮智)를 할(爲) 수 있(可以)다.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바깥(外)에서(由) 나(我)에게 녹음(鑠)이 아니(非)다(也). 이것(此)이 신(身)에게(諸) 근거함(本)이다(也). 천하(天下)의(之) 사람들(人)은 그(其) 성(性)이 모두(皆) 같(同)다. 그러므로(故) 그(其) 성(性)을 다할(盡) 수 있(能)다는 것(者)은 사람(人)의(之) 성(性)을 다할(盡) 수 있음(能)이다. 그(其) 하나하나(一一)가 모두(皆) 천명(天命)을 받음(受)을 알 수 있(可知)다(也). 이것(此)이 서민(庶民)에게(諸) 증명함(徵)이다(也). 우왕(禹)과 탕왕(湯)과 문왕(文)과 무왕(武)은 모두(皆) 천명(天命)에 그것(之)을 근거하(本)여 그것으로써(以) 이(斯) 백성(民)을 가르친(敎)다. 이것(此)이 ‘삼왕(三王)에게(諸)를 검증하(考)면서(而) 그르치(謬)지 않(不)는다’이다(也). 이(此) 도(道)를 세운(建立)다면 곧(則) 천지만물(天地萬物)에 순종하(歸順)지 않는 것이 없(莫不)다. 이것(此)이 ‘천지(天地)에(諸) 세워(建)도(而) 어그러지(悖)지 않(不)는다’이다(也). 여러(百) 신(神)이 명(命)을 받(承)는다. 화육(化育)을 돕(輔佑)는다. 모든 것(萬物)은 근본(本)이 같(一)다. 이(此)에(於) 검증할(驗) 수 있(可)다. 이것(此)이 ‘귀신(鬼神)에게 물(質)어도(而) 의심할 것이 없(無疑)다’이다(也). 일천(千) 세대(世)가 앞(前)에 있(在)고 일백(百) 세대(世)가 뒤(後)에 있(在)어도 예전(前)의 성인(聖)과 훗날(後)의 성인(聖)은 그(其) 헤아림(揆)이 반드시(必) 같(同)다. 이것(此)이 ‘여러(百) 대를 이(世)으나(以) 성인(聖人)을 기다리(俟)면서(而) 미혹되지 않(不惑)는다’이다(也). 어찌(豈) 증거(徵)가 없(無)다고 말할(曰) 수 있(可)고 어찌(豈) 높이(尊)지 않(不)았다고 말할(曰) 수 있(可)겠는가(乎). 도(道)라는 것(者)은 어찌(何) 도(道)인가(也). 천명(天命) 그것(之)을 성(性)이라 한(爲)다. 솔성(率性) 그것(之)을 도(道)라 이른(謂)다. 솔성(率性)이라는 것(者)은 중화(中和)의(之) 일정함(常)이 있음(有)이다(也).
<해석>
자신(身)에게 근거한다는 것은 도(道)가 성(性)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성(性)은 자신(身)에게 있다. 천명지성(天命之性)으로 넓히면서 채워 효(孝)와 제(弟)와 충(忠)과 신(信)과 인(仁)와 의(義)와 예(禮)와 지(智)를 할 수 있는 것이지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바깥에서 나에게 녹아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자신(身)에게 근거한다는 것이다. 천하(天下)의 사람들(人)은 그 성(性)이 모두 같다. 그러므로 그 성(性)을 다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람(人)의 성(性)을 다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하나하나가 모두 천명(天命)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서민(庶民)에게 증명한다는 것이다. 우왕(禹)과 탕왕(湯)과 문왕(文)과 무왕(武)은 모두 천명(天命)에 근거해서 이 백성(民)을 가르친다. 이것이 ‘우왕과 탕왕과 문왕에게 검증하면서 어긋나지 않는다’이다. 이 도(道)를 세운다면 곧 천지만물(天地萬物)에 따르지 않는 것이 없다. 이것이 ‘천지(天地)에 세워도 어그러지지 않는다’이다. 여러 신(神)이 명(命)을 받아 만들고 기름(化育)을 도우니 모든 것(萬物)은 근본이 같다. 이에 검증할 수 있다. 이것이 ‘귀신(鬼神)에게 물어도 의심할 것이 없다’이다. 일천 세대가 앞에 있고 일백 세대가 뒤에 있어도 예전의 성인(聖)과 훗날의 성인(聖)이 헤아리는 것은 반드시 같다. 이것이 ‘여러 대를 이으나 성인(聖人)을 기다리면서 미혹되지 않는다.’이다. 어찌 증거가 없다고 말할 수 있고 어찌 높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잇겠는가. 도(道)라는 것이 어찌 도(道)이겠는가. 천명(天命)을 성(性)이라 하고 성(性)을 좇음을 도(道)라 이른다. 성(性)을 좇는다는 것은 것은 중화(中和)의 일정함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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