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6일 일요일

중용자잠 16-自箴

<원문>

箴曰素隱者。無故而隱居也。君子之藏名隱居。必有甚不得已之故然後。乃合中和之義。伯夷虞仲孔子。或稱其隱居行義。或稱其隱居中權。見論語是皆遭人倫之變。處嫌疑之地。不得不遺世逃身。故合於義中於權。不失爲中庸之君子。若無故棄世。遁入深山。作詭異之行。立奇怪之論。當世目之爲異人。後世稱之爲神人。述者稱述也雖使流名不朽。吾不爲之矣。若其隱遯合乎中庸之義。則君子之道。依乎中庸。故當隱而隱。遯世不見知而不悔。此伯夷虞仲之類也。故曰惟聖者能之。素隱者。無故之隱也。遯世者。合義之隱也。


<직역>

경계해(箴) 말한(曰)다. 본질(素)을 숨긴(隱)다는 것(者)은 아무런 까닭이 없(無故)으면서(而) 은거(隱居)함이다(也). 군자(君子)의(之) 이름(名)을 감추(藏)고 은거(隱居)함은 반드시(必) 심히(甚) 어쩔 수 없음(不得已)의(之) 까닭(故)이 있(有)다. 연후(然後) 이에(乃) 중화(中和)의(之) 의미(義)에 맞(合)다. 백이(伯夷)와 우중(虞仲)과 공자(孔子)가 혹(或) 그(其) 은거(隱居)하며 의(義)를 행함(行)을 일컫(稱)고 혹(或) 그(其) 은거(隱居)하며 저울(權)에 부합함(中)을 일컫(稱)는데 [『논어(論語)』에 보인(見)다.』] 이것들(是)은 모두(皆) 인륜(人倫)의(之) 어그러짐(變)을 당해(遭)서 꺼리고 싫어함(嫌疑)의(之) 땅(地)에 머물(處)며 어쩔 수 없(不得不)이 세상사를 잊(遺世)고 몸을 피하여 도망침(逃身)이다. 그러므로(故) 의(義)에(於) 맞(合)고 저울(權)에(於) 부합한(中)다. 중용(中庸)의(之) 군자(君子)됨(爲)을 잃지 아니한(不失)다. 만약(若) 아무런 까닭 없(無故)이 세상과의 관계를 끊어 버리(棄世)고 깊은 산(深山)에 숨(遁)어 들어가(入)고 괴이하(詭)고 기이함(異)의(之) 행실(行)을 하(作)고 기괴(奇怪)함의(之) 학설(論)을 세우(立)고 당세(當世)에는 이름(目) 그것(之)을 비범한 사람(異人)이라 하(爲)고 후세(後世)에는 명성(稱) 그것(之)을 만능의 사람(神人)이라 한(爲)다. [서술하(述)는 사람(者)이 칭찬하여 말한(稱述)다(也).] 비록(雖) 전하(流)는 이름(名)으로 하여금(使) 길이 전하여 없어지지 않게 하(不朽)여도 나(吾)는 그것(之)을 하(爲)지 않(不)는다(矣). 만약(若) 그(其) 세상을 피하여 숨어 삶(隱遯)이 중용(中庸)의(之) 의미(義)에(乎) 맞(合)다면 곧(則) 군자(君子)의(之) 도(道)이고 중용(中庸)에(乎) 의지함(依)이다. 그러므로(故) 마땅히(當) 숨기(隱)고(而) 숨(隱)는다. ‘속세를 등져(遯世)서 알아주(見知)지 않(不)아도(而) 후회하지 않(不悔)는다’ 이것(此)은 백이(伯夷)와 우중(虞仲)의(之) 무리(類)이다(也). 그러므로(故) 말하기(曰)를 ‘오직(惟) 성자(聖者)가 그것(之)에 능하(能)다.’ ‘본질(素)을 숨긴(隱)다’는 것(者)은 아무런 까닭이 없음(無故)의(之) 숨음(隱)이다(也). ‘속세를 등진(遯世)다’는 것(者)은 의(義)에 맞음(合)의(之) 숨음(隱)이다(也).


<해석>

경계해 말한다. 본질(素)을 숨긴다는 것은 아무런 까닭 없이 세상을 피해 숨어 삶(隱居)이다. 군자(君子)의 이름을 감추고 세상을 피해 숨어 사(隱居)는 것에는 반드시 심히 어쩔 수 없는 까닭이 있다. 그러한 뒤에야 중화(中和)의 의미에 맞다. 백이(伯夷)와 우중(虞仲)과 공자(孔子)가 세상을 피해 숨어 살(隱居)며 의(義)를 행하는 것이나 세상을 피해 숨어 살(隱居)며 저울(權)에 부합함(中)을 일컫는데 [『논어(論語)』에 보인다.』] 이것들은 모두 인륜(人倫)의 어그러짐을 당해서 꺼리고 싫어하는 땅(地)에 머물면서 어쩔 수 없이 세상사를 잊고 몸을 피하여 도망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義)에 맞고 저울(權)에 부합하(中)고 중용(中庸)하는 군자(君子)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아무런 까닭 없이 세상과의 관계를 끊어 버리고 깊은 산에 숨어 들어가고 괴이하고 기이한 행실을 하고 기괴한 학설을 세우고 그 시대에는 이름을 비범한 사람이라 하고 훗날에는 명성을 만능의 사람이라 한다면 [서술하는 사람이 칭찬하여 말한다.] 전해지는 이름이 길이 전하여 없어지지 않게 된다 할지라도 나는 그것을 하지 않는다. 만약 세상을 피하여 숨어 삶(隱遯)이 중용(中庸)의 의미에 맞다면 곧 군자(君子)의 도(道)이고 중용(中庸)에 의지하는 것이므로 마땅히 숨기고 숨는다. ‘속세를 등져(遯世)서 알아주지 않아도 후회하지 않는다’ 이것은 백이(伯夷)와 우중(虞仲)의 무리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성인(聖者)만이 능하다.’ ‘본질(素)을 숨긴다’는 것은 아무런 까닭이 없이 숨는 것이다. ‘속세를 등진(遯世)다’는 것은 의(義)에 맞게 숨는 것이다.




<원문>

〇廢當讀之如荊軻廢之廢。謂身頹也。君子望道而行。遵道而進。遑遑如不及。盻盻如未之見。力盡氣竭。以至於廢。此所謂半塗而廢也。君子之嚮道也。若是其眞切惻怛。而古今注家。皆云半塗而停罷。誠使卒塗而停罷。則曷謂之君子乎。


<직역>

폐(廢)는 마땅히(當) 그것(之)을 읽음(讀)이 ‘형가(荊軻)가 쓰러졌(廢)다’의(之) 폐(廢)와 같(如)다. 몸(身)이 기울어짐(頹)을 이른(謂)다(也). 군자(君子)는 도(道)를 바라(望)면서(而) 행하(行)고 도(道)를 좇(遵)으면서(而) 나아간(進)다. 허둥지둥하는 모양(遑遑)이 도달하지 못함(不及)과 같(如)다. 힘쓰는 모양(盻盻)이 그것(之)을 보(見)지 못함(未)과 같(如)다. 힘이 다하여 지치(力盡)고 기력이 다하(氣竭)여 쓰러짐(廢)에(於) 이른(以至)다. 이것(此)이 소위(所謂) ‘반도이폐(半塗而廢)’이다(也). 군자(君子)의(之) 도(道)를 향함(嚮)은(也) 그(其) 진실(眞)로 절박하(切)고 간절히(惻) 애씀(怛)이 이와 같(若是)다. 그러나(而) 옛날과 지금(古今)에서 경전을 주석하는 사람들(注家)은 모두(皆) 이르기(云)를 ‘중도(半塗)에(而) 아주 그만둔(停罷)다.’ 만약(誠) 가령(使) 길(塗)에서 멈추(卒)고(而) 아주 그만두(停罷)면 곧(則) 어찌(曷) 그(之)를 군자(君子)라 이르(謂)겠는가(乎).


<해석>

폐(廢)는 마땅히 ‘형가(荊軻)가 쓰러졌(廢)다’의 폐(廢)와 같게 읽어야 한다. 몸이 기울어짐(頹)을 이른다. 군자(君子)는 도(道)를 바라면서 행하고 좇으면서 나아간다. 허둥지둥하는 모양이 도달하지 못한 듯하고 힘쓰는 모양이 보지도 못한 듯하니 힘과 기력이 다하여 쓰러지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길의 중간에서 쓰러진(半塗而廢)다’이다. 군자(君子)가 도(道)를 향하는 모습은 이토록 진실로 절박하고 간절히 애쓴다. 그러나 옛날과 지금 모두 경전을 주석하는 사람들은 모두 ‘길의 중간에서 아주 그만둔다’고 이른다. 만약 가령 길에서 멈추고 아주 그만두면 곧 어찌 그를 군자(君子)라 이르겠는가.




<원문>

〇遵道者。顯世之中庸也。遯世者。避世之中庸也。素隱者。兩無所當。


<직역>

도(道)를 좇음(遵)이라는 것(者)은 세상(世)에 나타남(顯)의(之) 중용(中庸)이다(也). 속세를 등짐(遯世)이라는 것(者)은 세상을 피해 숨음(避世)의(之) 중용(中庸)이다(也). 본질(素)을 숨김(隱)이라는 것(者)은 양 쪽(兩)에 마땅한(當) 바(所)가 없(無)다.


<해석>

도(道)를 좇음이라는 것은 세상에 드러난 중용(中庸)이다. 속세를 등짐(避世)이라는 것은 세상을 피해 숨은 중용(中庸)이다. 본질(素)을 숨김이라는 것은 양 쪽 모두에 해당하지 않는다.




<원문>

表記曰小雅曰高山仰止。景行行止。子曰詩之好仁如此。鄕道而行。中道而廢。忘身之老也。不知年數之不足也。俛焉曰有孳孳。斃而后已。鄭云廢謂力極疲頓。不能復行則止也。


<직역>

『표기(表記)』에서 말하기(曰)를 “「소아(小雅)」에서 말하기(曰)를 ‘높은 산(高山)을 우러러 보(仰)고(止) 큰 길(景行)을 다닌(行)다(止).’ 선생님(子)께서 말씀하시기(曰)를 ‘시(詩)의(之) 인(仁)을 좋아함(好)은 이와 같(如此)다. 길(道)을 향하(鄕)면서(而) 다닌(行)다. 도중(中道)에(而) 쓰러진(廢)다. 몸(身)의(之) 노쇠함(老)을 잊(忘)는다(也). 연수(年數)의(之) 부족(不足)을 알지 못한(不知)다(也).’ 부지런히 힘써(俛焉) 날마다(日) 부지런함(孳孳)이 있(有)다. 죽음(斃) 이후(而后)에 그친(已)다.’” [정현(鄭)이 이르기(云)를 “폐(廢)는 힘(力)이 다하(極)고 피곤해(疲)서 넘어져(頓) 다시(復) 행할(行) 수 없(不能)으니 곧(則) 그만둠(止)을 이른(謂)다(也).”]


<해석>

『표기(表記)』에서 말하기를 “「소아(小雅)」에서 말하기를 ‘높은 산을 우러러 보고 큰 길을 다닌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시(詩)의 인(仁)을 좋아함은 이와 같다. 길을 향하면서 다니고 길의 중간에서 쓰러져도 몸의 노쇠함을 잊고 살 날이 부족한 것을 알지 못한다.’ 부지런히 힘써 날마다 부지런하고 죽은 이후에야 그친다.’” [정현(鄭)이 이르기를 “폐(廢)는 힘이 다하고 피곤해서 넘어져 다시 행할 수 없으니 곧 그만둠을 이른다.”]


<해설>

俛焉曰有孳孳에서 曰은 日이다.




<원문>

〇鏞謂鄭注微誤。廢者屋頹也。君子鄕道而行。力盡氣竭。其身崩頹。如屋頹然也。豈罷止之謂乎。廢字之下。又有忘身孳孳。許多用力。中道而止者。豈如是乎。廢者身頹也。

冉求曰非不說子之道。力不足也。子曰力不足者。中道而廢。今女畫。


<직역>

내(鏞)가 이르기(謂)를 정주(鄭注)는 작(微)게 그르쳤(誤)다. 폐(廢)라는 것(者)은 집(屋)이 무너짐(頹)이다(也). 군자(君子)의 도(道)를 향하(鄕)면서(而) 행함(行)이 힘이 다하여 지치(力盡)고 기력이 다하(氣竭)여 그(其) 몸(身)이 허물어져 무너짐(崩頹)이 집(屋)의 쓰러질 듯함(頹然)과 같(如)다(也). 어찌(豈) 마치(罷)고 그침(止)의(之) 이름(謂)이겠는가(乎). 폐(廢)라는 글자(字)의(之) 아래(下)에 또한(又) 몸(身)을 잊(忘)고 부지런함(孳孳)과 허다(許多)하게 힘을 냄(用力)이 있(有)다. 도중(中道)에(而) 그만둠(止)이라는 것(者)이 어찌(豈) 이와 같(如是)겠는가(乎). 폐(廢)라는 것(者)은 몸(身)이 기울어짐(頹)이다(也). 

염구(冉求)가 말하기(曰)를 “선생님(子)의(之) 도(道)를 기뻐하(說)지 않음(不)은 아니(非)지만 힘(力)이 부족(不足)합니다(也).” 선생님(子)께서 말씀하시기(曰)를 “힘(力)이 부족(不足)하다는 것(者)은 도중(中道)에(而) 쓰러짐(廢)이다. 지금(今) 너(女)는 선을 긋(畫)는다.”


<해석>

내가 이르기를 정현(鄭)의 주석은 작게 그르쳤다. 폐(廢)라는 것은 집이 무너짐이다. 군자(君子)의 도(道)를 향하면서 행함이 힘과 기력이 다하여 그 몸이 허물어져 무너짐이 집의 쓰러질 듯함과 같다. 어찌 마치고 그침을 이르겠는가. 폐(廢)라는 글자의 아래에 또한 몸을 잊고 부지런함과 매우 힘을 냄이 있다.  길의 중간에서 그만둠이라는 것이 어찌 이와 같겠는가. 폐(廢)라는 것은 몸이 기울어짐이다.

염구(冉求)가 말하기를 “선생님의 도(道)를 기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힘이 모자랍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힘이 모자란다는 것은 길의 중간에서 쓰러지는 것인데 너는 선을 긋는구나.”




<원문>

〇鏞謂中道而廢。亦氣竭力盡。中道而身頹也。中道身頹者。頹而復興。畢竟至道。故孔子貴之。若中道罷止。則與自畫者奚擇焉。


<직역>

내(鏞)가 이르기(謂)를 “‘도중(中道)에(而) 쓰러진(廢)다’ 또한(亦) 기(氣)가 없어지(竭)고 힘(力)이 다하(盡)여 도중(中道)에(而) 몸(身)이 기울어짐(頹)이다(也). 도중(中道)에 몸(身)이 기울어진(頹) 사람(者)은 기울어지(頹)나(而) 다시 일어난(復興)다. 마침내(畢竟) 도(道)에 이른(至)다. 그러므로(故) 공자(孔子)는 그(之)를 공경한(貴)다. 만약(若) 도중(中道)에서 마치(罷)고 그치(止)면 곧(則) 스스로(自) 선을 긋(畫)는 사람(者)과(與) 어떻게(奚) 구별하(擇)겠는가(焉).”


<해석>

내가 이르기를 “‘길의 중간에서 쓰러진(中道而廢)다’ 또한 기(氣)가 없어지고 힘이 다하여 길의 중간에서 몸이 기울어짐이다. 길의 중간에서 몸이 기울어진 사람은 기울어져도 다시 일어나 마침내 도(道)에 이른다. 그러므로 공자(孔子)는 그를 공경한다. 만약 길의 중간에서 마치고 그치면 곧 스스로 선을 긋는 사람과 어떻게 구별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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