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箴曰誠者。聖人之別名。上誠者下誠者。皆當以聖人看。不可以天之道也四字。爲誠字之注脚。
<직역>
경계해(箴) 말한(曰)다. 성(誠)한 사람(者)은 성인(聖人)의(之) 딴 이름(別名)이다. 높(上)이 성(誠)한 사람(者)도 낮(下)게 성(誠)한 사람(者)도 모두(皆) 마땅히(當) 성인(聖人)으로써(以) 여긴(看)다. ‘천지도야(天之道也)’ 네(四) 글자(字)로써(以) 성(誠)이라는 글자(字)의(之) 주해(注脚)라 할(爲) 수 없(不可)다.
<해석>
경계해 말한다. 정성스럽게 하(誠)는 사람은 성인(聖人)의 딴 이름이다. 더 정성스럽게 하(誠)는 사람도 덜 정성스럽게 하(誠)는 사람도 모두 성인(聖人)으로 여겨야 한다. ‘천지도야(天之道也)’를 성(誠)이라는 글자의 주해라 할 수 없다.
<원문>
〇誠者生知安行之聖人也。誠之者學知困知利行勉行之人也。
<직역>
성(誠)하는 사람(者)은 나면서 앎(生知)와 편안히 행함(安行)의(之) 성인(聖人)이다(也). 성(誠)에 이르(之)려는 사람(者)은 배우고 앎(學知)과 곤궁해져서야 앎(困知)과 이로워서 행함(利行)과 억지로 행함(勉行)의(之) 사람(人)이다(也).
<해석>
정성스럽게하(誠)는 사람은 나면서 알(生知)고 편안히 행하(安行)는 성인(聖人)이다. 정성스럽게하(誠)려는 사람은 배우고 알(學知)고 곤궁해져서야 알(困知)고 이로워서 행하(利行)고 억지로 행하(勉行)는 사람(人)이다.
<원문>
箴曰學問思辨。乃誠之者之所爲也。學知困知利行勉行者。苟以一誠字用力。雖愚必明。雖柔必强。
<직역>
경계해(箴) 말한(曰)다. 배움(學)과 물음(問)과 바람(思)과 분별함(辨)은 이에(乃) 정성스럽게 함(誠)에 이르(之)려는 사람(者)의(之) 하(爲)는 바(所)이다(也). 배우고 앎(學知)과 곤궁해져서야 앎(困知)과 이로워서 행함(利行)과 억지로 행함(勉行)이라는 것(者)은 진실로(苟) 하나(一)의 성(誠)이라는 글자(字)로써(以) 힘을 쓴(用力)다. 비록(雖) 어리석(愚)어도 반드시(必) 명(明)하고 아무리(雖) 약하(柔)더라도 반드시(必) 힘쓴(强)다.
<해석>
경계해 말한다. 배움(學)과 물음(問)과 바람(思)과 분별함(辨)은 이에 정성스럽게 하(誠)려는 사람의 하는 바이다. 배우고 앎(學知)과 곤궁해져서야 앎(困知)과 이로워서 행함(利行)과 억지로 행함(勉行)이라는 것은 진실로 하나의 성(誠)이라는 글자로 힘쓴다. 비록 어리석어도 반드시 깨닫(明)고 아무리 약하(柔)더라도 반드시 힘쓴(强)다.
<원문>
〇强者固執故能久。久者庸也。朱子曰明者擇善之功。强者固執之效。
강(强)이라는 것(者)은 굳(固)게 유지함(執)이므로(故) 능히(能) 오래 머무른(久)다. 구(久)라는 것(者)은 한결같음(庸)이다(也). 주자(朱子)가 말하기(曰)를 “명(明)이라는 것(者)은 선(善)을 고름(擇)의(之) 공로(功)이다. 강(强)이라는 것(者)은 굳(固)게 유지함(執)의(之) 효과(效)이다.”
<해석>
강(强)이라는 것은 굳게 유지함이므로 오래 머무를 수 있다. 구(久)라는 것은 한결같음(庸)이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명(明)이라는 것은 선(善)을 고르는 공로이다. 강(强)이라는 것은 굳게 유지한 것에 의한 효과이다.”
<원문>
〇此節每句必有三箇弗字。總計十五箇弗字。括而束之。只是一箇誠字。形容其好學力行光景。察其裏面。隱有一箇誠字。
<직역>
이(此) 절(節)은 구절(句)마다(每) 반드시(必) 세(三) 개(箇)의 ‘불(弗)’이라는 글자(字)가 있(有)다. 총계(總計) 열다섯(十五) 개(箇)의 ‘불(弗)’이라는 글자(字)이다. 그것들(之)을 묶(括)고(而) 모으(束)면 다만(只) 이것들(是)은 한(一) 개(箇)의 ‘성(誠)’이라는 글자(字)이다. 그(其) 학문을 좋아함(好學)과 힘써 행함(力行)의 상황(光景)을 드러낸(形容)다. 그(其) 뒷 면(裏面)을 살핀(察)다. 희미하(隱)게 한(一) 개(箇)의 ‘성(誠)’이라는 글자(字)가 있(有)다.
<해석>
이 절(節)은 구절마다 반드시 3개의 ‘불(弗)’이라는 글자가 있으니 총 15개의 ‘불(弗)’이라는 글자가 있다. 그것들을 묶고 모으면 다만 이것들은 한 개의 ‘성(誠)’이라는 글자이다. 그 학문을 좋아하고 힘써 행하는 상황을 드러내니 그 뒷면을 살피면 희미하(隱)게 한 개의 ‘성(誠)’이라는 글자가 있다.
<원문>
〇十五箇弗字。一段有鑿井及泉。殺人見血底意。
<직역>
열다섯(十五) 개(箇)의 ‘불(弗)’이라는 글자(字) 한 토막(一段)에는 우물을 파(鑿井)면 샘(泉)에 이르(及)고 사람을 죽여(殺人) 피(血)를 본(見)다는 작정한 뜻(底意)이 있(有)다.
<해석>
15개의 ‘불(弗)’이라는 글자 한 토막에는 우물을 파면 샘에 이를 때까지 파고 사람을 죽여 피를 볼 것이라고 작정한 뜻이 있다.
<해설>
일단 시작하면 끝까지 해야한다는 뜻이다.
<원문>
〇措者置也。
<직역>
조(措)라는 것(者)은 둠(置)이다(也).
<해석>
조(措)라는 것은 둠이다.
<원문>
箴曰自誠而明者。聖人也。天之道自明而誠者。學者也。人之道性字當讀之如堯舜性之之性。所謂生知而安行也。敎者受敎而後知者也。所謂學知困知利行勉行之類是也。生知學知。及其成聖成賢。實無差等。故曰誠則明矣。明則誠矣。
<직역>
경계해(箴) 말한(曰)다. 성(誠)을 말미암(自)으면서(而) 명(明)하는 사람(者)은 성인(聖人)이다(也). [하늘(天)의(之) 도(道)] 명(明)함을 말미암(自)으면서(而) 성(誠)하는 사람(者)은 배우(學)는 사람(者)이다(也). [사람(人)의(之) 도(道)] 성(性)이라는 글자(字)는 마땅히(當) 그것(之)을 읽음(讀)이 ‘요순(堯舜)께서는 천성대로 하셨(性之)다’의(之) 성(性)과 같(如)다. 소위(所謂) 나면서 알(生知)고(而) 편안히 행함(安行)이다(也). 교(敎)라는 것(者)은 가르침(敎)을 받(受)고(而) 남보다 뒤에 깨달(後知)은 사람(者)이다(也). 소위(所謂) ‘배우고 앎(學知)과 곤궁해져서야 앎(困知)과 이로워서 행함(利行)과 억지로 행함(勉行)’의(之) 무리(類)가 이것(是)이다(也). 나면서 앎(生知)과 배우고 앎(學知)은 그(其) 슬기(聖)를 갖추(成)고 어짊(賢)을 갖춤(成)에 미친(及)다. 본질(實)은 차이가 나는 등급(差等)이 없(無)다. 그러므로(故) 말하기(曰)를 성(誠)하면 곧(則) 명(明)한다(矣). 명(明)하면 곧(則) 성(誠)한다(矣).
<해석>
경계해 말한다. 정성스럽게 함(誠)을 말미암으면서 깨닫(明)는 사람은 성인(聖人)이다. [하늘(天)의 도(道)] 깨달음(明)을 말미암으면서 정성스럽게 하(誠)는 사람은 배우(學)는 사람이다. [사람(人)의 도(道)] 성(性)이라는 글자는 ‘요순(堯舜)께서는 천성대로 하셨(性之)다’의 성(性)과 같게 읽어야 한다. 이른바 나면서 알(生知)고 편안히 행함(安行)이다. 교(敎)라는 것은 가르침을 받고 남보다 뒤에 깨달은 사람이다. 이른바 ‘배우고 앎(學知)과 곤궁해져서야 앎(困知)과 이로워서 행함(利行)과 억지로 행함(勉行)’의 무리가 이것이다. 나면서 앎(生知)과 배우고 앎(學知)은 그 슬기(聖)와 어짊(賢)을 갖추는데 본질은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정성스럽게 하(誠)면 곧 깨닫(明)고 깨달(明)으면 곧 정성스럽게 한(誠)다’고 말한다.
<원문>
〇此節連上。不可別之爲一章。
<직역>
이(此) 절(節)은 위(上)를 연결한(連)다. 그것(之)을 나눠(別) 한(一) 장(章)으로 할(爲) 수 없(不可)다.
<해석>
이 절(節)은 위를 연결한다. 그것을 나눠 한 장(章)으로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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