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6일 일요일

중용자잠 19-自箴

<원문>

箴曰素者。本質也。讀之如繪事後素之素。素其位者。本其位也。行者行己也。


<직역>

경계해(箴) 말한(曰)다. 소(素)라는 것(者)은 본질(本質)이다(也). [그것(之)을 읽음(讀)이 ‘채색하(繪)는 일(事)은 희게 한(素) 다음(後)이다’의(之) 소(素)와 같(如)다.] 그(其) 자리(位)에서 분수를 따른(素)다는 것(者)은 그(其) 자리(位)에 근거함(本)이다(也). 행(行)이라는 것(者)은 행동함(行己)이다(也).


<해석>

경계해 말한다. 소(素)라는 것은 본바탕이다. [그것을 읽음이 ‘채색하는 일은 희게 한(素) 다음이다’의 소(素)와 같다.] 그 자리에서 분수를 따른다는 것은 그 자리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행(行)이라는 것은 행동함이다.




<원문>

〇其本質富貴則以富貴行己。斯中和也。其本質貧賤則以貧賤行己。斯中和也。夷狄患難。莫不皆然。無入而不自得。所得者中而和之至也。今日富貴而明日貧賤。不失此中和。今日夷狄而明日患難。不失此中和。則中而庸也。庸者常然也。無人而不自得。豈非常然乎。


<직역>

그(其) 본질(本質)이 부귀(富貴)하다면 곧(則) 부귀(富貴)로써(以) 행동한(行己)다. 이것(斯)이 중화(中和)이다(也). 그(其) 본질(本質)이 빈천(貧賤)하다면 곧(則) 빈천(貧賤)으로써(以) 행동한(行己)다. 이것(斯) 중화(中和)이다(也). 이적(夷狄)이든 환난(患難)이든 모두(皆) 그러하(然)지 않는 자가 없(莫不)었다. 들어가(入)면서(而) 스스로 터득하(自得)지 않음(不)이 없(無)다. 얻(得)는 것(者)이 중(中)과(而) 화(和)의(之) 지극함(至)인 바(所)이다(也). 지금(今日) 부귀(富貴)하나(而) 내일(明日) 빈천(貧賤)하여도 이(此) 중화(中和)를 잃지 않(不失)고 지금(今日) 이적(夷狄)이고(而) 내일(明日) 환난(患難)하여도 이(此) 중화(中和)를 잃지 않(不失)는다면 곧(則) 중(中)하면서(而) 용(庸)이다(也). 용(庸)이라는 것(者)은 항상(常) 그러함(然)이다(也). 들어가(入)면서(而) 스스로 터득하(自得)지 않음(不)이 없(無)다. 어찌(豈) 항상(常) 그러함(然)이 아니(非)겠는가(乎).


<해석>

그 본바탕이 넉넉하고 높다면 곧 넉넉하고 높게 행동한다. 이것이 중화(中和)이다. 그 본바탕이 가난하고 천하다면 곧 가난하고 천하게 행동한다. 이것이 중화(中和)이다. 오랑캐이든 근심과 걱정함이든 모두 그러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들어가면서 스스로 터득하지 않음이 없는데 얻는 것이 중(中)과 화(和)의 지극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넉넉하고 높으나 내일 가난하고 천하여도 이 중화(中和)를 잃지 않고 지금 오랑캐이고 내일 근심과 걱정을 하더라도 이 중화(中和)를 잃지 않는다면 곧 중(中)하면서 용(庸)하는 것이다. 용(庸)이라는 것은 항상 그러하는 것이다. 들어가면서 스스로 터득하지 않음이 없으니 어찌 항상 그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해설>

無人而不自得에서 人은 入이다.




<원문>

〇太王事獯粥。文王事昆夷。仲雍君吳。斷髮文身。子頃之言。見左傳。其本質乃夷狄。居夷狄之中。故以夷狄行己。和之至也。文王在羑里。安於獄。箕子爲囚奴。安於囚。孔子微服過宋。安於微。微服者。賤服也。其本質乃患難。故以患難行己。和之至也。


<직역>

태왕(太王)은 훈죽(獯粥)을 섬겼(事)고 문왕(文王)은 곤이(昆夷)를 섬겼(事)다. 중옹(仲雍)은 오 지역(吳)에서 임금으로 임하(君)여 머리를 단발하고 몸에 문신을 했(斷髮文身)다. [자경(子頃)의(之) 말(言)이 『좌전(左傳)』에 보인(見)다.] 그(其) 본질(本質)은 곧(乃) 이적(夷狄)이다. [이적(夷狄)의(之) 사이(中)에서 머문(居)다.] 그러므로(故) 이적(夷狄)대로(以) 행동하(行己)면 화(和)의(之) 지극함(至)이다(也). 문왕(文王)은 유리(羑里)에 있(在)었으나 감옥(獄)에서(於) 편안하게 지냈(安)다. 기자(箕子)는 갇힌(囚) 종(奴)이 됐(爲)으나 감옥(囚)에서(於) 편안하게 지냈(安)다. 공자(孔子)가 남루한 옷(微服)으로 송 나라(宋)를 지났(過)으나 천함(微)에서(於) 편안하게 지냈(安)다. [미복(微服)이라는 것(者)은 천한(賤) 옷(服)이다(也).] 그(其) 본질(本質)은 곧(乃) 환난(患難)이다. 그러므로(故) 환난(患難)으로써(以) 행동하(行己)면 화(和)의(之) 지극함(至)이다(也).


<해석>

태왕(太王)은 훈죽(獯粥)을 섬겼고 문왕(文王)은 곤이(昆夷)를 섬겼다. 중옹(仲雍)은 오 지역(吳)에서 임금으로 임하여 머리를 단발하고 몸에 문신을 했다. [자경(子頃)의 말이 『좌전(左傳)』에 보인다.] 그 본바탕은 곧 오랑캐이다. [오랑캐의 사이에서 머문다.] 그러므로 오랭캐대로 행동하면 화(和)의 지극함이다. 문왕(文王)은 잡혀 갇혔으나 감옥에서 편안하게 지냈다. 기자(箕子)는 갇힌 종이 됐으나 감옥에서 편안하게 지냈다. 공자(孔子)가 해지고 너저분한 옷으로 송 나라(宋)를 지났으나 천한 중에도 편안하게 지냈다. [미복(微服)이라는 것은 천한 옷이다.] 그 본바탕은 곧 근심과 걱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근심과 걱정하는대로 행동하면 화(和)의 지극함이다.




<원문>

〇在上位。安於上。在下位。安於下。所執者中也。中以正己。故無所求於他人也。上不怨天。下不尤人。和之至也。居上居下。無時不然。庸之至也。庸者有常也。


<직역>

윗 자리(上位)에 있(在)다면 위(上)에서(於) 편안하게 지내(安)고 아랫 자리(下位)에 있(在)어도 아래(下)에서(於) 편안하게 지낸(安)다면 잡(執)은 것(者)이 중(中)인 바(所)이다(也). 중(中) 그것으로써(以) 몸(己)을 바로잡(正)는다. 그러므로(故) 타인(他人)<다른 사람>에게(於) 구하(求)는 바(所)가 없(無)다(也). 위(上)로는 하늘(天)을 원망하(怨)지 않(不)고 아래(下)로는 타인(人)을 탓하(尤)지 않(不)다면 화(和)의(之) 지극함(至)이다(也). 위(上)에 머물(居)든 아래(下)에 머물(居)든 늘(時) 그렇지 않음(不然)이 없(無)다면 용(庸)의(之) 지극함(至)이다(也). 용(庸)이라는 것(者)은 일정함(常)이 있음(有)이다(也).


<해석>

윗 자리에 있다면 위에서 편안하게 지내고 아랫 자리에 있어도 아래에서 편안하게 지낸다면 잡은 것은 중(中)이기 때문이다. 중(中)으로 몸을 바로잡으므로 다른 사람에게 구하는 바가 없다. 위로는 하늘(天)을 원망하지 않고 아래로는 타인을 탓하지 않는다면 화(和)의 지극함이다. 위에 머물든 아래에 머물든 늘 그렇지 않은 적이 없다면 용(庸)의 지극함이다. 용(庸)이라는 것은 일정함이 있는 것이다.




<원문>

箴曰居與行相反。易與險相反。俟與徼相反。徼者迎以求也。命者天心之定分。幸者人事之巧成。


<직역>

경계해(箴) 말한(曰)다. 머묾(居)과(與) 나아감(行)은 서로 반대된(相反)다. 편안함(易)과(與) 위험(險)은 서로 반대된(相反)다. 기다림(俟)과(與) 구함(徼)은 서로 반대된(相反)다. 요(徼)라는 것(者)은 맞이함(迎) 그것으로써(以) 구함(求)이다(也). 명(命)이라는 것(者)은 하늘(天)의 마음(心)의(之) 정해진(定) 뜻(分)이다. 행(幸)이라는 것(者)은 사람(人)의 일(事)의(之) 약삭빠르(巧)게 마침(成)이다.


<해석>

경계해 말한다. 머묾(居)과 나아감(行)은 서로 반대된다. 편안함(易)과 위험(險)은 서로 반대된다. 기다림(俟)과 구함(徼)은 서로 반대된다. 요(徼)라는 것은 맞이하여 구하는 것이다. 명(命)이라는 것은 하늘(天)의 마음(心)의 정해진 뜻이다. 행(幸)이라는 것은 사람이 일을 약삭빠르게 마치는 것이다.




<원문>

〇居易者。得中和以自安。俟命者。所以庸也。


<직역>

‘편안함(易)에 머문(居)다’는 것(者)은 중화(中和)를 얻음(得) 그것으로써(以) 스스로(自) 편안하게 지냄(安)이다. ‘명(命)을 기다린(俟)다’는 것(者)은 용(庸)하는 방법(所以)이다(也).


<해석>

‘편안한 곳에 머문다’는 것은 중화(中和)를 얻어서 스스로 편안하게 지내는 것이다. ‘명(命)을 기다린다’는 것은 용(庸)하는 방법이다.




<원문>

〇左傳哀十六年。楚白公勝作亂。葉公子高曰吾聞之。以險徼幸者。其求無饜。偏重必離。


<직역>

『좌전(左傳)』 애공(哀) 십육(十六)년(年)에 초나라(楚)의 백공승(白公勝)이 난리를 일으켰(作亂)다. 섭공(葉公) 자고(子高)가 말하기(曰)를 “내(吾)가 그것(之)을 듣기로는(聞) 위험(險)으로써(以) 우연히 잘된(徼幸) 사람(者)은 그(其) 욕구(求)에 만족함(饜)이 없(無)다. 한쪽으로 치우치(偏重)면 반드시(必) 어긋난(離)다.”


<해석>

『좌전(左傳)』 애공(哀) 16년에 초나라의 백승공(白公勝)이 난리를 일으켰다. 섭공(葉公)이었던 자고(高)가 말하기를 “내가 듣기로는 위험한 짓으로 우연히 잘된 사람은 그 욕구에 만족함이 없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반드시 어긋난다.”




<원문>

〇大戴禮曰孝子之事親也。居易而俟命。不興儉行以徼幸。曾子本孝篇又曰易行以侯天命。蓋介子推之行也。衞將軍


<직역>

『대대례(大戴禮)』에서 말하기(曰)를 “효자(孝子)의(之) 어버이(親)를 섬김(事)은(也) 편안함(易)에 머물(居)면서(而) 명(命)을 기다린(俟)다. 행동(行)을 부족하게 함(儉) 그것으로써(以) 우연히 잘됨(徼幸)으로 시작하(興)지 않(不)는다.” [「증자본효(曾子本孝)」 편(篇)] 또한(又) 말하기(曰)를 “편안한(易) 행동(行) 그것으로써(以) 천명(天命)을 기다림(侯)은 모두(蓋) 개자추(介子推)의(之) 행동(行)이다(也).” [「위장군(衞將軍)」]


<해석>

『대대례(大戴禮)』에서 말하기를 “효자(孝子)가 어버이를 섬기는 것은 편안한 곳에 머물면서 명(命)을 기다리는 것이다. 행동을 부족하게 하여 우연히 잘되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증자본효(曾子本孝)」 편] 또한 말하기를 “편안한 행동으로 천명(天命)을 기다림은 모두 개자추(介子推)의 행동이다.” [「위장군(衞將軍)」]


<해설>

易行以侯天命에서 侯은 俟일 것이다.




<원문>

箴曰位與德相稱則爲中庸。富貴有富貴之德。貧賤有貧賤之德。民莫不順。位與德不相稱則不得爲中庸。富貴而行貧賤之德。患難而行富貴之德。民乃作慝。故失諸正鵠。反求諸其身。


<직역>

경계해(箴) 말한(曰)다. 자리(位)와(與) 덕(德)이 서로(相) 드러낸(稱)다면 곧(則) 중용(中庸)이 된(爲)다. [부귀(富貴)하다면 부귀(富貴)의(之) 덕(德)이 있(有)다. 빈천(貧賤)하다면 빈천(貧賤)의(之) 덕(德)이 있(有)다.] 백성(民)이 따르(順)지 않는 자가 없다. 자리(位)와(與) 덕(德)이 서로(相) 드러내(稱)지 않(不)는다면 곧(則) 중용(中庸)이 될(爲) 수 없(不得)다. 부귀(富貴)하나(而) 빈천(貧賤)의(之) 덕(德)을 행하(行)고 환난(患難)하나(而) 부귀(富貴)의(之) 덕(德)을 행한(行)다. 백성(民)이 이에(乃) 나쁜 짓(慝)을 행한(作)다. 그러므로(故) 한가운데(正鵠)에서(諸) 어긋나(失)면 돌이켜(反) 그(其) 자신(身)에게(諸) 구한(求)다.


<해석>

경계해 말한다. 자리(位)와 덕(德)이 서로 드러낸다면 곧 중용(中庸)이 된다. [넉넉하고 높다면 넉넉하고 높은 덕(德)이 있고 가난하고 천하다면 가난하고 천한 덕(德)이 있다. [백성이 따르지 않는 자가 없는데 자리(位)와 덕(德)이 서로 드러내지 않는다면 곧 중용(中庸)이 될 수 없다. 넉넉하고 높으면서 가난하고 천한 덕(德)을 행하고 근심과 걱정하나 넉넉하고 높은 덕(德)을 행하면 백성이 이에 나쁜 짓을 행한다. 그러므로 한가운데에서 어긋나면 돌이켜 그 자신에게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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