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箴曰誠成者。六書之諧聲也。以其成己成物。非誠不能。故字從成也。
<직역>
경계해(箴) 말한(曰)다. 성(誠)과 성(成)이라는 것(者)은 육서(六書)의(之) 해성(諧聲)이다(也). 그(其) 자기(己)를 이룸(成)과 물(物)을 이룸(成)으로써(以) 성(誠)이 아니(非)면 할 수 없(不能)다. 그러므로(故) 글자(字)는 성(成)을 따른(從)다(也).
<해석>
경계해 말한다. 성(誠)과 성(成)이라는 것은 한자의 구조와 사용에 관한 여섯 가지 방법 중에서 절반은 뜻을 나타내고 다른 절반은 소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 자기(己)를 이루(成)고 백성을 가르치(成物)는 것은 정성(誠)이 아니면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글자는 성(成)을 따른다.
<원문>
〇朱子曰道也之道音導。
<직역>
주자(朱子)가 말하기(曰)를 “‘도(道)이다(也)’의(之) 도(道)의 소리(音)는 도(導)이다.”
<해석>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도(道)이다’에서 도(道)의 소리는 도(導)이다.”
<원문>
〇大學曰物有本末。事有終始。意心身爲本。家國天下爲末。誠正修爲始。齊治平爲終。此經云誠者物之終始二字。與大學所言同。今之學者。看得不同。故大學之終始。有摸捉。中庸之終始。沒摸捉。豈有是理。大學雖以誠意爲始工。齊家治國平天下。亦非誠不能。故誠意別爲一章。與正心修身之節。不相連接。古之禮記本所引淇奧詩。以自修治民兩下爲說。結之以盛德至善民不能忘。親賢樂利沒世不忘。則成己成物。皆在誠意中矣。中庸所謂物之終始。亦不外乎成己成物。曷嘗與大學所言有毫髮之殊乎。不誠則無以誠意。不誠則無以正心。不誠則無以修身。不誠則無以齊家治國平天下。此之謂不誠無物。內者己也。外者物也。意心身爲內。國家天下爲外。
<직역>
『대학(大學)』에서 말하기(曰)를 “물(物)에 처음과 끝(本末)이 있(有)다. 일(事)에 마지막과 처음(終始)이 있(有)다.” 의(意)와 심(心)과 신(身)을 처음(本)으로 하(爲)고 가(家)와 국(國)과 천하(天下)를 끝(末)으로 한(爲)다. 성(誠)과 정(正)과 수(修)는 처음(始)으로 하(爲)고 제(齊)와 치(治)와 평(平)을 마지막(終)으로 한(爲)다. 이(此) 경(經)에서 이르기(云)를 ‘성(誠)이라는 것(者)은 물(物)의(之) 마지막과 처음(終始)이다.’ 두(二) 글자(字)와(與) 『대학(大學)』이 말하(言)는 바(所)는 같(同)다. 지금(今)의(之) 학자들(學者)은 서로 같지 않(不同)다고 봤(看得)다. 그러므로(故) 『대학(大學)』의(之) 마지막과 처음(終始)에서 찾(摸)아 잡음(捉)이 있(有)다. 『중용(中庸)』의(之) 마지막과 처음(終始)에 찾(摸)아 잡음(捉)이 없(沒)다. 어찌(豈) 이런(是) 이치(理)가 있(有)겠는가. 『대학(大學)』이 비록(雖) 성의(誠意)로써(以) 처음(始) 일(工)로 한(爲)다. 제가(齊家)와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 또한(亦) 성(誠)이 아니(非)면 할 수 없(不能)다. 그러므로(故) 성의(誠意)는 따로(別) 한(一) 장(章)으로 한(爲)다. 정심(正心)과 수신(修身)의(之) 절(節)과(與) 서로(相) 맞닿게 할(連接) 수 없(不)다. [옛날(古)의(之) 『예기(禮記)』 판본(本)] ‘기욱(淇奧)’시(詩)를 인용하(引)는 바(所)에서 자수(自修)와 치민(治民) 두(兩) 끝부분(下)으로써(以) 가르침(說)으로 한(爲)다. ‘성덕(盛德)과 지선(至善)을 백성(民)은 잊(忘)을 수 없(不能)다’와 ‘친(親)과 현(賢)과 락(樂)과 이(利)이니 세상을 떠나(沒世)도 잊지 아니한(不忘)다’로써(以) 그것(之)을 끝낸(結)다. 곧(則) 자기(己)를 이룸(成)과 물(物)을 이룸(成)은 모두(皆) 뜻(意)을 정성스럽게 함(誠) 과정(中)에 있(在)다(矣). 『중용(中庸)』에서 소위(所謂) ‘물(物)의(之) 마지막과 처음(終始)’ 또한(亦) 자기(己)를 이룸(成)과 물(物)을 이룸(成)에 불과하(不外乎)다. 어찌(曷) 일찍이(嘗) 『대학(大學)』이 말하(言)는 바(所)와(與) 가느다란 털(毫髮)의(之) 다름(殊)이 있(有)겠는가(乎). 성(誠)하지 않(不)는다면 곧(則) 뜻(意)을 정성스럽게 할(誠) 수 없(無以)다. 성(誠)하지 않(不)는다면 곧(則) 마음(心)을 바르게 할(正) 수 없(無以)다. 성(誠)하지 않(不)는다면 곧(則) 수신(修身)할 수 없(無以)다. 성(誠)하지 않(不)는다면 곧(則) 집(家)을 가지런하게 함(齊)과 나라(國)를 다스림(治)과 천하(天下)를 평정할(平) 수 없(無以)다. 이것(此)의(之) 이름(謂)이 ‘성(誠)하지 않(不)는다면 물(物)이 없(無)다’다. 내(內)라는 것(者)은 자기(己)이다(也). 외(外)라는 것(者)은 물(物)이다(也). 의(意)와 심(心)과 신(身)을 안(內)으로 한(爲)다. 나라(國)와 집(家)과 천하(天下)를 밖(外)으로 한(爲)다.
<해석>
『대학(大學)』에서 말하기를 “물(物)에 처음과 끝이 있고 일(事)에 마지막과 처음이 있다. 의(意)와 심(心)과 신(身)을 처음으로 하고 가(家)와 국(國)과 천하(天下)를 끝으로 한다. 성(誠)과 정(正)과 수(修)는 처음으로 하고 제(齊)와 치(治)와 평(平)을 마지막으로 한다. 이 경(經)에서 이르기를 ‘성(誠)이라는 것은 물(物)의(之) 마지막과 처음이다.’ 두 글자와 『대학(大學)』이 말하는 바는 같은데도 지금의 학자들은 서로 같지 않다고 봤다. 그러므로 『대학(大學)』의 마지막과 처음에서 찾아서 잡는데 『중용(中庸)』의 마지막과 처음에서는 찾아서 잡지 못한다.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대학(大學)』이 비록 뜻(意)을 정성스럽게 함(誠)을 처음 일로 하더라도 집(家)을 가지런하게 하(齊)고 나라(國)를 다스리(治)고 천하(天下)를 평정함(平)도 정성(誠)이 아니면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뜻(意)을 정성스럽게 함(誠)은 따로 한 장(章)으로 한다. 마음(心)을 바르게 함(正)과 몸(身)을 닦음(修)의 절(節)과 서로 연결할 수 없다. [옛날의 『예기(禮記)』 판본] ‘기욱(淇奧)’시를 인용한 것 중에 스스로(自) 닦음(修)과 백성(民)을 바로잡음(治) 두 끝부분을 가르침으로 한다. ‘충만한(盛) 덕(德)과 지극한(至) 선(善)을 백성(民)은 잊지 못한다’와 ‘마땅히 친하여야 할 사람과 친하(親)고 어진 사람을 존경하(賢)고 백성의 즐거움을 즐거워하(樂)고 백성의 이익을 구하(利)니 세상을 떠나도 잊지 아니한다’로써 끝내니 곧 자기(己)를 이룸(成)과 백성을 가르침(成物)은 모두 뜻(意)을 정성스럽게 하(誠)는 과정에 있다. 『중용(中庸)』에서 이른바 ‘물(物)의 마지막과 처음’도 자기(己)를 이룸(成)과 백성을 가르침(成物)에 불과하다. 어찌 일찍이 『대학(大學)』이 말하는 바와 가느다란 털의 다름이 있겠는가. 정성스럽게 하(誠)지 않는다면 곧 뜻(意)을 정성스럽게 할(誠) 수 없다. 정성스럽게 하(誠)지 않는다면 곧 마음(心)을 바르게 할(正) 수 없다. 정성스럽게 하(誠)지 않는다면 몸(身)을 닦(修)을 수 없다. 정성스럽게 하(誠)지 않는다면 곧 집(家)을 가지런하게 하(齊)거나 나라(國)를 다스리(治)거나 천하(天下)를 평정할(平) 수 없다. 이것의 이름이 ‘정성스럽게 하(誠)지 않는다면 물(物)도 없다’이다. 내(內)라는 것은 자기(己)이고 외(外)라는 것은 물(物)이다. 의(意)와 심(心)과 신(身)을 안으로 하고 나라(國)와 집(家)과 천하(天下)를 밖으로 한다.
<원문>
〇時措者。無時而不施用也。誠意時用誠。正心時用誠。齊家治國平天下時用誠。隨時用誠。無適不宜。此之謂時措之宜也。
<직역>
시조(時措)라는 것(者)은 때맞춰(時)서(而) 베풀어서 쓰(施用)지 않음(不)이 없(無)다(也). 성의(意誠)는 때맞춰(時) 성(誠)을 쓴(用)다. 정심(正心)은 때맞춰(時) 성(誠)을 쓴(用)다. 제가(齊家)와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는 때맞춰(時)는 성(誠)을 쓴(用)다. 수시(隨時)로 성(誠)을 쓴(用)다. 조금(適)도 마땅하(宜)지 않음(不)이 없(無)다. 이것(此)의(之) 이름(謂)이 ‘때맞춰 처리함(時措)이 마땅함(宜)에 이른(之)다’이다(也).
<해석>
때맞춰 처리함(時措)이라는 것은 때맞춰서 베풀어서 쓰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뜻(意)을 정성스럽게 함(誠)은 때맞춰 정성(誠)을 쓰고 마음(心)을 바르게 함(正)도 때맞춰 정성(誠)을 쓰고 집(家)을 가지런하게 함(齊)과 나라(國)를 다스림(治)과 천하(天下)를 평정함(平)도 때맞춰 정성(誠)을 쓴다. 그때그때 정성(誠)을 쓰니 조금도 마땅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이것의 이름이 ‘때맞춰 처리함이 마땅하게 된다’이다.
<원문>
〇此一節卽大學中庸符合處。今以物之終始。爲萬物之終始。而可通乎。
<직역>
이(此) 한(一) 절(節)은 곧(卽)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이 들어맞(符合)는 곳(處)이다. 지금(今) 물(物)의(之) 마지막과 처음(終始)으로써(以) 모든 것(萬物)의(之) 마지막과 처음(終始)으로 하(爲)면(而) 통할(通) 수 있(可)겠는가(乎).
<해석>
이 한 절(節)은 곧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이 들어맞는 곳이다. 지금 물(物)의 마지막과 처음(終始)을 모든 것(萬物)의 마지막과 처음으로 하면 통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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