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箴曰德者。行吾之直心也。不行無德也。孝弟忠信。仁義禮智。斯爲之德。未及躬行。安有德乎。然而謂之德性者。性本樂善。隨感而發者。無非善心。擴充此心。可以爲仁義禮智。故名其性曰德性也。此性所受。本上天之命也。受天命者。不敢不尊之。如奉君命者。不敢不敬之也。
<직역>
경계해(箴) 말한(曰)다. 덕(德)이라는 것(者)은 ‘나(吾)의(之) 곧(直)은 마음(心)을 행함(行)’이다(也). 없(無)는 덕(德)을 행함(行)이 아니(不)다(也). 효제충신(孝弟忠信)과 인의예지(仁義禮智) 이러한(斯) 그것들(之)을 덕(德)으로 한(爲)다. 직접(躬) 행함(行)에 미치지 못하(未及)면 어찌(安) 덕(德)이 있(有)겠는가(乎). 그러나(然而) 그것(之)을 덕성(德性)이라 이르(謂)는 것(者)은 성(性)이 선(善)을 즐김(樂)에 근거한(本)다. 느낌(感)을 따르(隨)면서(而) 발(發)하는 것(者)은 선(善)한 마음(心)이 아님(非)이 없(無)다. 이(此) 마음(心)을 넓히고 채우(擴充)면 인의예지(仁義禮智)를 할(爲) 수 있(可以)다. 그러므로(故) 그(其) 성(性)을 이름하(名)여 말하기(曰)를 덕성(德性)이다(也). 이(此) 성(性)의 받(受)는 바(所)는 상천(上天)의(之) 명(命)에 근거한(本)다(也). 천명(天命)을 받(受)는다는 것(者)은 그것(之)을 높이(尊)지 않음(不)을 감히 하지 못함(不敢)이다. 임금(君)의 명령(命)을 받음(奉)과 같(如)다는 것(者)은 그것(之)을 공경하(敬)지 않음(不)을 감히 하지 못함(不敢)이다(也).
<해석>
경계해 말한다. 덕(德)이라는 것은 ‘나의 곧은 마음(心)을 행하(行)는 것’이다. 없는 덕(德)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효(孝)와 제(弟)와 충(忠)과 신(信)과 인(仁)와 의(義)와 예(禮)와 지(智) 이것들을 덕(德)으로 한다. 직접 행하(行)지 못하면 어찌 덕(德)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것을 덕성(德性)이라 이르는 것은 성(性)이 선(善)을 즐기기 때문이다. 느낌을 따르면서 쏘아지(發)는 것은 선(善)한 마음(心)이 아닌 것이 없다. 이 마음(心)을 넓히고 채우면 인의예지(仁義禮智)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성(性)을 덕성(德性)이라 이름하여 말한다. 이 성(性)은 상천(上天)의 명(命)에서 받은 것이다. 천명(天命)을 받는다는 것은 감히 그것을 높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임금의 명령을 받는 것과 같다는 것은 감히 그것을 공경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원문>
朱子曰道由也。
<직역>
주자(朱子)가 말하기(曰)를 “도(道)는 말미암음(由)이다(也).”
<해석>
주자(胄子)가 말하기를 “도(道)는 말미암음이다.”
<원문>
〇按道問學道中庸兩道字。皆當如此看。道者人所由也。
<직역>
생각건대(按) ‘도문학(道問學)’과 ‘도중용(道中庸)’에서 두(兩) ‘도(道)’라는 글자(字)는 모두(皆) 마땅히(當) 이렇게(此) 봄(看)과 같(如)다. 도(道)라는 것(者)은 사람(人)이 말미암(由)는 바(所)이다(也).
<해석>
생각건대 ‘도문학(道問學)’과 ‘도중용(道中庸)’에서 두 ‘도(道)’라는 글자는 모두 사람(人)이 말미암는 바로 봐야 한다.
<원문>
箴曰尊德性者至誠也。廣大者博厚也。高明者高明也。上章云至誠之道可配天地。文相照也。然孔子之道。下學而上達。故中庸雖以知天爲首功。其下學之方。必以道問學爲首功。問學之法。以精微爲極致。學旣精微。則身由中庸之道。由是觀之。上三段天德也。下三段人道也。溫故以下。所以爲悠久也。此本李曠菴之義
<직역>
경계해(箴) 말한(曰)다. 덕성(德性)을 높인(尊)다는 것(者)은 지극히(至) 성(誠)함이다(也). 광대(廣大)라는 것(者)은 넓(博)고 두터움(厚)이다(也). 고명(高明)이라는 것(者)은 높은 곳(高)에서 밝힘(明)이다(也). 윗(上) 장(章)에서 이르기(云)를 ‘지극한(至) 정성(誠)의(之) 도(道)는 하늘(天)과 땅(地)에 짝할(配) 수 있(可)다.’ 글들(文)이 서로 대조된(相照)다(也). 그런데(然) 공자(孔子)의(之) 도(道)는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이다. 그러므로(故) 『중용(中庸)』이 비록(雖) 하늘(天)을 앎(知)으로써(以) 으뜸 공로(首功)로 해(爲)도 그(其) 아래를 배움(下學)의(之) 방법(方)은 반드시(必) 물음(問)과 배움(學)을 말미암음(道)으로써(以) 으뜸 공로(首功)로 한(爲)다. 물음(問)과 배움(學)의(之) 방법(法)은 자세함(精微)으로써(以) 최고의 경지(極致)로 한(爲)다. 배움(學)이 이미(旣) 자세하(精微)면 곧(則) 몸(身)은 중용(中庸)의(之) 도(道)를 따른(由)다. 이것(是)을 말미암(由)아 그것(之)을 보(觀)면 위(上) 세(三) 부분(段)은 하늘(天)의 덕(德)이다(也). 아래(下) 세(三) 부분(段)은 사람(人)의 도(道)이다(也). 온고(溫故) 이하(以下)는 아득하게 오래(悠久)되(爲)는 방법(所以)다(也). [이것(此)은 이광암(李曠菴)의(之) 의미(義)에 근거한(本)다.]
<해석>
경계해 말한다. 덕성(德性)을 높인다는 것은 지극히 정성스럽게 함(誠)이다. 광대(廣大)라는 것은 넓고 두터움이다. 고명(高明)이라는 것은 높은 곳에서 밝히는 것이다. 윗 장(章)에서 이르기를 ‘지극한 정성(誠)의 도(道)는 하늘(天)과 땅(地)에 짝할 수 있다.’ 글들이 서로 대조된다. 그런데 공자(孔子)의 도(道)는 아래를 배워 위에 달하는 것(下學而上達)이다. 그러므로 『중용(中庸)』이 비록 하늘(天)을 아는 것을 으뜸 공로로 해도 그 아래를 배우는 방법은 묻고 배움을 말미암는 것을 으뜸 공로로 한다. 묻고 배우는 방법은 자세함을 으뜸 공로로 한다. 배움이 이미 자세하면 곧 몸은 중용(中庸)의 도(道)를 따른다. 이를 말미암아 보면 위 세 부분은 하늘(天)의 덕(德)이고 아래 세 부분은 사람(人)의 도(道)이다. 옛 것을 앎 이하는 아득하게 오래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이광암(李曠菴)의 해석을 따른 것이다.]
<원문>
〇先儒於此。每以尊德性爲行。道問學爲知。必欲雙雙分排。不敧不側。不免有牽强之病耳。
<직역>
선대의 유학자들(先儒)은 이(此)에(於) 늘(每) 존덕성(尊德性)으로써(以) 행(行)으로 하(爲)고 도문학(道問學)을 지(知)로 한(爲)다. 반드시(必) 쌍(雙雙)으로 나누어 배치하(分排)고자 하(欲)니 기울어지(敧)지 않(不)고 치우치(側)지 않(不)는다. 억지로 끌어 감(牽强)의(之) 병(病)이 있음(有)을 면하지 못할(不免) 따름이다(耳).
<해석>
선대의 유학자들은 이에 늘 존덕성(尊德性)을 행함(行)으로 하고 도문학(道問學)을 앎(知)으로 한다. 반드시 쌍으로 나누어 배치하고자 하니 기울어지지도 않고 치우치지도 않으니 억지로 끌어가려는 병이 있을 수밖에 없을 따름이다.
<원문>
〇致廣大則恐博而不精。故救之曰盡精微。極高明則恐過高失中。故救之曰道中庸。廣大高明則貴在悠久。故戒之曰溫故知新。敦厚以崇禮。上文所謂博厚高明悠久之意也。
<직역>
넓고 큼(廣大)에 이르(致)면 곧(則) 넓(博)으면서(而) 지저분함(不精)을 두려워한(恐)다. 그러므로(故) 그것(之)을 고쳐(救) 말하기(曰)를 ‘자세함(精微) 다한(盡)다.’ 높은 곳(高)에서 밝힘(明)에 이르(極)면 곧(則) 지나치(過)게 높(高)아 중(中)을 잃음(失)을 두려워한(恐)다. 그러므로(故) 그것(之)을 고쳐(救) 말하기(曰)를 ‘중용(中庸)을 말미암(道)는다.’ 넓고 크(廣大)고 높은 곳(高)에서 밝히(明)면 곧(則) 귀한 것(貴)이 아득하게 오래됨(悠久)에 있(在)다. 그러므로(故) 그것(之)을 경계하(戒)여 말하기(曰)를 ‘온고지신(溫故知新)한다. 정직함(敦厚) 그것으로써(以) 예(禮)를 높인(崇)다.’ 윗(上) 글(文)에서 소위(所謂) ‘넓히(博)고 두터이 하(厚)고 높이(高)고 밝히(明)고 아득하(悠)고 오래 머무르도록 한(久)다’의(之) 뜻(意)이다(也).
<해석>
넓고 크게 되면 넓으면서 지저분하게 될까봐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고쳐 ‘최대한 자세히 한다’고 말한다. 높은 곳에서 밝히게 되면 곧 지나치게 높아 중(中)을 잃을까봐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고쳐 ‘중용(中庸)을 말미암는다’고 말한다. 넓고 크고 높은 곳에서 밝히면 곧 귀한 것이 아득하게 오래된다. 그러므로 그것을 경계하여 ‘옛 것을 익히(溫故)고 새로운 것을 안(知新)다. 정직함으로 예(禮)를 높인다.’ 윗 글에서 이른바 ‘넓히고 두터이 하고 높이고 밝히고 아득하고 오래 머무르도록 한다’의 뜻이다.
<원문>
〇始於廣大。終於崇禮者。先博文而後約禮也。
<직역>
넓고 큼(廣大)에서(於) 시작하(始)고 예(禮)를 높임(崇)에서(於) 마친(終)다는 것(者)은 먼저(先) 학문에 밝(博文)고(而) 나중에(後) 예(禮)를 갖춤(約)이다(也).
<해석>
넓고 큼에서 시작하고 예(禮)를 높임에서 마친다는 것은 먼저 학문에 밝고 나중에 예(禮)를 갖춘다는 것이다.
<원문>
箴曰中庸爲一篇宗旨。至於此節。流入於節目間者。只恐極高明者有過高之病。急下中庸二字。提掇警醒。非眞以中庸爲節目也。
<직역>
경계해(箴) 말한(曰)다. 중용(中庸)을 한(一) 책(篇)에서 중요한 뜻(宗旨)으로 한(爲)다. 이(此) 절(節)에(於) 이른(至)다. 규칙의 목록(節目) 사이(間)에(於) 흘러 들어온(流入) 것(者)은 다만(只) 높은 곳(高)에서 밝힘(明)에 이른(極) 사람(者)이 지나치(過)게 높음(高)의(之) 병(病)이 있음(有)을 두려워한(恐)다. 갑자기(急) 아래(下) 중용(中庸) 두(二) 글자(字)가 옮겨져(提掇) 타일러 깨우친(警醒)다. 진실로(眞) 중용(中庸)으로써(以) 규칙의 목록(節目)으로 하(爲)지 않(非)는다(也).
<해석>
경계해 말한다. 중용(中庸)을 한 책에서 중요한 뜻으로 하여 이 절(節)에 이른다. 규칙의 목록 사이에 들어온 것은 다만 높은 곳에서 밝히게 된 사람이 지나치게 높은 병이 있을까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갑자기 아래 중용(中庸) 두 글자가 옮겨져 타일러 깨우치니 진실로 중용(中庸)을 규칙의 목록으로 하지 않는다.
<원문>
〇極高明三字。超出塵埃之表。俯瞰萬物。曲直汚潔。昭森羅列。其見若是者。其行己易於過高。君子於此。又重思之。必求至善之所在。爲吾身所由之道。此之謂道中庸。
<직역>
‘극고명(極高明)’ 세(三) 글자(字)는 속된 것(塵埃)의(之) 겉(表)에서 벗어나(超出) 모든 것(萬物)을 내려다 봄(俯瞰)이다. 굽음(曲)과 곧음(直)과 더러움(汚)과 깨끗함(潔)과 밝음(昭)과 어두움(森)이 늘어놓여진(羅列)다. 그(其) 이와 같음(若是)을 보(見)는 사람(者)은 그(其) 행동(行己)을 지나치(過)게 높은 곳(高)에서(於) 고친(易)다. 이(此)에(於) 군자(君子) 또한(又) 그것(之)을 깊(重)게 생각한(思)다. 반드시(必) 지극한(至) 선(善)의(之) 있는 바(所在)를 선택하(求)고 내(吾) 몸(身)이 따르는 바(所由)의(之) 도(道)를 함(爲) 이것(此)의(之) 이름(謂)이 ‘도중용(道中庸)’이다.
<해석>
‘극고명(極高明)’ 세 글자는 속된 것의 겉에서 벗어나 모든 것(萬物)을 내려다 본 것이다. 굽음과 곧음과 더러움과 깨끗함과 밝음과 어두움이 늘어놓여져 있으니 이와 같은 것을 보는 사람은 그 행동을 지나치게 높은 곳에서 고친다. 이에 군자(君子)도 그것을 깊게 생각하여 반드시 지극한 선(善)이 있는 곳을 선택하고 내 몸(身)이 따르는 것의 도(道)를 함을 ‘도중용(道中庸)’이라 이른다.
<원문>
〇今之所謂道中庸者。除去第一等義理。俯取第二第三等義理。以免時俗之謗言。此下流之賤也。烏得爲中庸。
<직역>
지금(今)의(之) 소위(所謂) 도중용(道中庸)이라는 것(者)은 첫째(第一) 등급(等)의 옳(義)은 이치(理)를 사라지게 하(除去)고 둘째(第二)와 셋째(第三) 등급(等)의 옳(義)은 이치(理)를 구부려(俯) 취하(取)여 그것으로써(以) 그때의 유행(時俗)의(之) 비방하는 말(謗言)을 면한(免)다. 이것(此)이 비천한 지위(下流)의(之) 천함(賤)이다(也). 어찌(烏) 중용(中庸)으로 할(爲) 수 있(得)겠는가.
<해석>
지금의 이른바 도중용(道中庸)이라는 것은 첫째 등급의 옳은 이치를 사리지게 하고 둘째와 셋째 등급의 옳은 이치를 구부려 취해서 그때 유행하는 비방들을 면한다. 이것이 비천한 사람들의 천함이다. 어찌 중용(中庸)으로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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