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6일 일요일

중용자잠 17-自箴

<원문>

箴曰費者。散而大也。隱者。閟而微也。說文云費者散財用也。易曰肆而隱。義相近也。


<직역>

경계해(箴) 말한(曰)다. 비(費)라는 것(者)은 흩어지(散)면서(而) 넓어짐(大)이다(也). 은(隱)이라는 것(者)은 깊숙하(閟)면서(而) 자세함(微)이다(也). [『설문(說文)』에서 이르기(云)를 “비(費)라는 것(者)은 재물의 씀씀이(財用)를 흩음(散)이다(也).”] 『역(易)』에서 말하기(曰)를 “진열되(肆)나(而) 그윽하(隱)다.” 의미(義)가 비슷하(相近)다(也).


<해석>

경계해 말한다. 비(費)라는 것은 흩어지면서 넓어지는 것이다. 희미함(隱)이라는 것은 깊숙하면서 자세한 것이다. [『설문(說文)』에서 이르기를 “비(費)라는 것은 재물의 씀씀이를 흩트리는 것이다.”] 『역(易)』에서 말하기를 “진열되나 그윽하다.” 의미가 비슷하다.




<원문>

〇夫婦者。匹夫匹婦。卽所謂愚夫愚婦也。


<직역>

부부(夫婦)라는 것(者)은 평범한 남자와 평범한 여자(匹夫匹婦)이다. 곧(卽) 소위(所謂) 어리석은 남자와 어리석은 여자(愚夫愚婦)이다(也).


<해석>

부부(夫婦)라는 것은 평범한 남자와 평범한 여자(匹夫匹婦)이니 곧 이른바 어리석은 남자와 어리석은 여자(愚夫愚婦)이다.


<해설>

부부(夫婦)는 군자(君子)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위에서 말한 소인(小人)의 다른 표현이다.




<원문>

〇君子之道。卽天道也。自其布散處而觀之。則其理著顯。故愚夫皆知。愚婦能行。自其幽閟處而言之。則其奧微妙。故雖聖人亦有所不知不能。此天道也。


<직역>

군자(君子)의(之) 도(道)는 곧(卽) 하늘(天)의 도(道)이다(也). 그(其) 널리(布) 흩어진(散) 부분(處)을 말미암(自)으면서(而) 그것(之)을 보(觀)면 곧(則) 그(其) 이치(理)가 드러나(著)고 나타난(顯)다. 그러므로(故) 어리석은 남자(愚夫)도 모두(皆) 알(知)고 어리석은 여자(愚婦)도 능히(能) 행한(行)다. 그(其) 그윽하(幽)고 깊숙한(閟) 부분(處)을 말미암(自)으면서(而) 그것(之)을 말하(言)면 곧(則) 그(其) 깊이(奧)가 미묘(微妙)하다. 그러므로(故) 비록(雖) 성인(聖人) 또한(亦) 어느정도(有所)는 알지 못하(不知)고 할 수 없(不能)다. 이것(此)이 하늘(天)의 도(道)이다(也).


<해석>

군자(君子)의 도(道)는 곧 하늘(天)의 도(道)이다. 널리 흩어진 부분을 고려하면서 보면 그 이치가 드러나고 나타나므로 어리석은 남자도 모두 알(知)고 어리석은 여자도 행할(行) 수 있다. 그윽하고 깊숙한 부분을 고려하면서 말하면 곧 그 깊이가 뚜렷하지 않고 아득하므로 비록 성인(聖人)일지라도 어느정도는 알지 못하(不知)고 할 수 없(不能)다. 이것이 하늘(天)의 도(道)이다.




<원문>

〇上天之載。廣大神妙。無所不能。天何不加廓乎。地何不加闊乎。日月何不常明乎。四時何不常和乎。想造化之妙。而觀造化之跡。則人猶有所憾矣。有所憾者。非眞以天地爲小也。謂造化之廣大。宜不止此。


<직역>

상천(上天)의(之) 일(載)은 광대(廣大)하며 신묘(神妙)하며 능통하지 않은 것이 없(無所不能)다. 하늘(天)은 어째서(何) 크기(廓)를 더하(加)지 못하(不)는가(乎). 땅(地)은 어째서(何) 넓음(闊)을 더하(加)지 못하(不)는가(乎). 해와 달(日月)은 어째서(何) 항상(常) 밝히(明)지 못하(不)는가(乎). 사시(四時)는 어째서(何) 항상(常) 알맞(和)지 못하(不)는가(乎). 조화(造化)의(之) 묘(妙)를 생각하(想)면서(而) 조화(造化)의(之) 발자취(跡)를 보(觀)면 곧(則) 사람들(人)은 근심하(憾)는 바(所)가 있(有)는 듯하(猶)다(矣). 근심하(憾)는 바(所)가 있(有)다는 것(者)은 정말로(眞) 천지(天地)로써(以) 하찮은 것(小)으로 함(爲)이 아니(非)다(也). 조화(造化)의(之) 광대(廣大)함에 마땅히(宜) 여기(此)에서 멈추지 않아야 함(不止)을 이른(謂)다.


<해석>

상천(上天)의 일(載)은 넓고 크며 신기하고 영묘하며 능통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하늘(天)은 어째서 더 커지지 못하고 땅(地)은 어째서 더 넓어지지 못하고 해와 달(日月)은 어째서 항상 밝히지 못하고 봄여름가을겨울(四時)은 어째서 항상 알맞지 못하는가. 낳고 기르고 죽임(造化)의 정교함을 생각하면서 낳고 기르고 죽임(造化)의 발자취를 보면 곧 사람들은 근심하는 바가 있는 듯하다. 근심하는 바가 있다는 것은 정말로 천지(天地)를 하찮은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낳고 기르고 죽임(造化)은 넓고 큰 것이니 여기에서 멈추지 않아야함을 이른다.




<원문>

箴曰天道至隱而能見。至微而能顯。自其見顯處而觀之。則至廣至大。天下莫能載焉。自其隱微處而言之。則如芒如忽。天下莫能破焉。莫能載者。所現者大也。莫能破者。所隱者微也。


<직역>

경계해(箴) 말한(曰)다. 하늘(天)의 도(道)는 지극히(至) 은(隱)하나(而) 능히(能) 나타난(見)다. 지극히(至) 미(微)하나(而) 능히(能) 드러난(顯)다. 그(其) 보이(見)고 드러난(顯) 부분(處)을 말미암(自)으면서(而) 그것(之)을 보(觀)면 곧(則) 아주 넓(至廣)고 아주 크(至大)다. ‘천하(天下)가 능히(能) 알고 행함(載)이 없(莫)다(焉).’ 그(其) 은(隱)하고 미(微)한 부분(處)을 말미암(自)으면서(而) 그것(之)을 말하(言)면 곧(則) 형체가 없는 모양(芒)과 같(如)고 어두운 모양(忽)과 같(如)으니 ‘천하(天下)가 능히(能) 깨뜨림(破)이 없(莫)다(焉).’ ‘능히(能) 알고 행함(載)이 없(莫)다’는 것(者)은 드러난(現) 것(者)이 큰(大) 바(所)이다(也). ‘능히(能) 깨뜨릴(破) 수는 없(莫)다’는 것(者)은 은(隱)한 것(者)이 미(微)한 바(所)이다(也).


<해석>

경계해 말한다. 하늘(天)의 도(道)는 지극히 희미하(隱)나 나타날 수 있고 지극히 자세하(微)나 드러날 수 있다. 그 보이고 드러난 부분을 고려하면서 보면 곧 아주 넓고 아주 크니 ‘천하(天下) 모두가 알고 행할 수는 없다.’ 그 희미하(隱)고 자세한(微) 부분을 고려하면서 말하면 형체가 없는 듯하고 어두은 듯하니 ‘천하(天下) 모두가 어길 수만은 없다.’ ‘알고 행할 수는 없다’는 것은 드러난 것이 크기 때문이다. ‘어길 수만은 없다’는 것은 희미한(隱) 것이 자세하(微)기 때문이다.




<원문>

箴曰鳶飛戾天。魚躍于淵者。引上天造物之妙。喩文王作人之盛也。其詩本然。故今引之以證造物之妙。


<직역>

경계해(箴) 말한(曰)다. ‘솔개(鳶)가 날(飛)아서 하늘(天)에 이르(戾)고 물고기(魚)가 못(淵)에서(于) 뛰며 좋아한(躍)다’는 것(者)은 상천(上天)이 물(物)을 기름(造)의(之) 묘(妙)를 인용하(引)여 문왕(文王)의 됨됨이(作人)의(之) 뛰어남(盛)을 깨우쳐 준(喩)다(也). 그(其) 시(詩)는 원래(本) 그러하(然)다. 그러므로(故) 지금(今) 그것(之)을 인용함(引) 그것으로써(以) 물(物)을 기름(造)의(之) 묘(妙)를 증명했(證)다.


<해석>

경계해 말한다. ‘솔개가 날아서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가 못에서 뛰며 좋아하네’라는 것은 상천(上天)이 모든 것(物)을 기름의 정교함을 인용하여 문왕(文王)의 됨됨이가 훌륭함을 깨우쳐주니 그 시(詩)는 원래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그것을 인용하여 모든 것(物)을 기름의 정교함을 증명했다.




<원문>

〇察者。審視也。上下審視。其跡可見也。天道至隱至微。必上下審視。察其隱微。然後其造化之妙。乃見乃顯。若鳶飛魚躍之類是也。察鳶之天飛。察魚之淵躍。則造化之跡。昭其顯矣。

朱子曰鳶飛可見。魚躍亦可見。而所以飛所以躍。果何物也。


<직역>

찰(察)이라는 것(者)은 살펴봄(審視)이다(也). 상하(上下)를 살펴보(審視)면 그(其) 발자취(跡)를 볼(見) 수 있(可)다(也). 하늘(天)의 도(道)는 지극히(至) 은(隱)하고 지극히(至) 미(微)하니 반드시(必) 상하(上下)를 살펴보(審視)고 그(其) 은미(隱微)함을 살핀(察) 연후(然後) 그(其) 조화(造化)의(之) 묘(妙)가 비로소(乃) 나타나(見)고 비로소(乃) 드러난(顯)다. 이(若) ‘솔개(鳶)가 날(飛)고 물고기(魚)가 뛰며 좋아한(躍)다’의(之) 종류(類)가 이것(是)이다(也). 솔개(鳶)의(之) 하늘(天)로 날음(飛)을 살피(察)고 물고기(魚)의(之) 못(淵)에서 뛰며 좋아함(躍)을 살피(察)면 곧(則) 조화(造化)의(之) 발자취(跡)가 그(其) 나타나는 것(顯)을 밝힌(昭)다(矣).

주자(朱子)가 말하기(曰)를 “솔개(鳶)가 남(飛)을 볼(見) 수 있(可)고 물고기(魚)가 뛰며 좋아함(躍) 또한(亦) 볼(見) 수 있(可)다. 그런데(而) 나(飛)는 까닭(所以)과 뛰며 좋아하(躍)는 까닭(所以)은 과연(果) 어떤(何) 것(物)인가(也).”


<해석>

찰(察)이라는 것은 살펴봄이다. 위아래(上下)를 살펴보면 그 발자취를 볼 수 있다. 하늘(天)의 도(道)는 지극히 희미하(隱)고 지극히 자세하(微)니 반드시 위아래(上下)를 살펴보고 그 희미하고 자세함(隱微)을 살핀 뒤에야 그 낳고 기르고 죽임(造化)의 정교함이 비로소 나타나고 드러난다. 이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며 좋아한다’의 종류가 이것이다. 솔개가 하늘로 나는 것을 살피고 물고기가 못에서 뛰며 좋아하는 것을 살피면 곧 낳고 기르고 죽임(造化)의 발자취가 그 나타나는 것을 밝힌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솔개가 남을 볼 수 있고 물고기가 뛰며 좋아함도 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까닭과 뛰며 좋아하는 까닭은 과연 어떤 것인가.”




<원문>

〇朱子曰鳶飛魚躍費也。必有一箇什麼物事。使得他如此。此便是隱。


<직역>

주자(朱子)가 말하기(曰)를 “‘솔개(鳶)가 날(飛)고 물고기(魚)가 뛰며 좋아한(躍)다’는 널리 쓰임(費)이다(也). 반드시(必) 한(一) 개(箇)의 어떤(什麼) 일(物事)이 있(有)다면 그것(他)을 이와 같(如此)도록 한(使得)다. 이것(此)이 다른 것이 아니라 곧(便是) 은(隱)이다.”


<해석>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며 좋아한다’는 널리 쓰임(費)이다. 반드시 한 개의 어떤 일(物事)이 생긴다면 그것을 이와 같도록 한다. 이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곧 은(隱)이다.”




<원문>

〇右朱子二說。至精至微。深得詩人之旨。至於化育流行之說。却只渾全。凡渾全者。後學未易曉。


<직역>

오른쪽(右) 주자(朱子)의 두(二) 말씀(說)은 더할 나위 없이 정밀하고 미세하(至精至微)다. 시인(詩人)의(之) 뜻(旨)을 알아냈(深得)한다. 나중(至於)의 화육(化育)이 널리 퍼짐(流行)의(之) 말씀(說)은 도리어(却) 다만(只) 온전함(全)을 흐린(渾)다. 무릇(凡) 온전함(全)을 흐린(渾)다는 것(者)은 후배들(後學)이 쉽(易)게 깨닫(曉)지 못함(未)이다.


<해석>

오른쪽 주자(朱子)의 두 말씀은 더할 나위 없이 정밀하고 미세하며 시인(詩人)의 뜻을 알아냈다. 나중의 만들어 기름(化育)이 널리 퍼졌다는 말씀은 도리어 온전함을 흐린다. 무릇 온전함을 흐린다는 것은 후배들이 쉽게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해설>

‘만들어 기름이 널리 퍼진(化育流行)다’는 『중용장구(中庸章句)』에 나오는 내용이다.




<원문>

箴曰端者。始也。造端者。作始也。春秋傳曰履端乎始。序則不愆。杜註云步歷之始。以爲端首。端者始也。君子之道。始於愚夫之所知。及其推而極之。仰觀乎天。俯察乎地。皆見其造化之跡。而其隱奧微妙之體。終不可見。此所謂聖人有所不知也。


<직역>

경계해(箴) 말한(曰)다. 단(端)이라는 것(者)은 시작(始)이다(也). 단(端)을 지음(造)이라는 것(者)은 시작(始)을 함(作)이다(也). 춘추전(春秋傳)에서 말하기(曰)를 “정월 초하루(履端)를 시작(始)으로 하(乎)니 차례(序)와 법칙(則)이 어그러지(愆)지 않(不)는다.” 두주(杜註)에서 이르기(云)를 “책력(歷)을 헤아림(步)의(之) 시작(始) 그것으로써(以) 처음(端首)으로 한(爲)다. 단(端)이라는 것(者)은 시작(始)이다(也).” 군자(君子)의(之) 도(道)는 어리석은 남자(愚夫)의(之) 아는 바(所知)에서(於) 시작한(始)다. 마침내(及其) 넓히(推)면서(而) 그것(之)을 다한(極)다. 하늘(天)에서(乎) 우러러본(仰觀)다. 땅(地)에서(乎) 굽어 살핀(俯察)다. 모두(皆) 그(其) 조화(造化)의(之) 발자취(跡)를 보(見)나(而) 그(其) 희미하(隱)고 깊(奧)고 자세하(微)고 묘함(妙)의(之) 근본(體)을 마침내(終) 볼(見) 수 없(不可)다. 이것(此)이 소위(所謂) ‘성인(聖人)도 알지 못하(不知)는 바(所)가 있(有)다’이다(也).


<해석>

경계해 말한다. 단(端)이라는 것은 시작이다. 단(端)을 지음이라는 것은 시작함이다. 『춘추(春秋)』 주석서에서 말하기를 “정월 초하루를 시작으로 하니 차례와 법칙이 어그러지지 않는다. 두예(杜)의 주석에서 이르기를 “책력을 헤아리기 시작하는 것을 처음으로 한다. 단(端)이라는 것은 시작이다.” 군자(君子)의 도(道)는 어리석은 남자의 아는 바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넓히면서 다하면 하늘(天)에서 우러러보고 땅(地)에서 굽어 살핀다. 모두 그 낳고 기르고 죽임(造化)의 발자취를 보나 그 희미하(隱)고 깊고 자세하(微)고 정교함의 근본을 마침내 볼 수 없다. 이것이 이른바 ‘성인(聖人)도 알지 못하(不知)는 바가 있다’이다.




<원문>

〇夫婦者。愚夫也。不可作居室人倫說。


<직역>

부부(夫婦)라는 것(者)은 어리석은 남자(愚夫)이다(也). 거실(居室)에서 인륜(人倫)의 말씀(說)을 지(作)을 수 없(不可)다.


<해석>

부부(夫婦)라는 것은 어리석은 남자이다. 평소에 기거하는 방에서 인륜(人倫)의 말씀을 지을 수는 없다.




<원문>

〇其隱若是而莫見乎隱。其微若是而莫顯乎微。此君子所以愼其獨也。


<직역>

그(其) 은(隱)은 이와 같(若是)으니(而) 은(隱)보다(乎) 잘 나타남(見)은 없(莫)다. 그(其) 미(微)는 이와 같(若是)으니(而) 미(微)보다(乎) 잘 드러남(顯)이 없(莫)다. 이것(此)이 군자(君子)가 그(其) 홀로(獨)에도 삼가(愼)는 까닭(所以)이다(也).


<해석>

그 희미함(隱)은 이와 같으니 희미함(隱)보다 잘 나타나는 것은 없다. 그 자세함(微)은 이와 같으니 자세함(微)보다 잘 드러나는 것은 없다. 이것이 군자(君子)가 그 홀로에도 삼가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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