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箴曰惟天下至聖。孔子也。惟天下至誠。亦孔子也。仲尼祖述以下。至肫肫其仁。皆贊美孔子之言。而古今諸家。未有明指。豈不恨哉。上文云萬物竝育。小德川流。大德敦化。皆所以贊孔子。而朱子屬之天道。故竝此至聖至誠二節。不屬之孔子也。然聲名洋溢一段。非仲尼而誰也。
<직역>
경계해(箴) 말한(曰)다. ‘오직(惟) 천하(天下)의 지극히(至) 슬기로운 사람(聖)’은 공자(孔子)이다(也). ‘오직(惟) 천하(天下)의 지극히(至) 정성스럽게 하는 사람(誠)’ 또한(亦) 공자(孔子)이다(也). ‘중니(仲尼)가 본받아 계승했(祖述)다’ 이하(以下)에서 ‘정성스럽(肫)고 정성스럽(肫)다. 그(其) 인(仁)이여’에 이르기까지(至) 모두(皆) 공자(孔子)의(之) 말씀(言)을 기린(贊美)다. 그러나(而) 고금(古今)의 여러 학파들(諸家)은 뜻(指)을 밝힘(明)이 있은 적이 없(未有)다. 어찌(豈) 유감으로 생각하(恨)지 않(不)겠는가(哉). 위의 글(上文)에서 이르기(云)를 ‘모든 것(萬物)이 가지런히 자란(竝育)다’와 ‘작(小)은 덕(德)은 냇물의 흐름(川流)이다’와 ‘큰(大) 덕(德)은 힘써(敦) 교화한(化)다’는 모두(皆) 공자(孔子)를 기리(贊)는 방법(所以)이다. 그러나(而) 주자(朱子)는 하늘(天)의 도(道)에 그것(之)을 연결한(屬)다. 그러므로(故) 모두(竝) 이(此) ‘지성(至聖)’과 ‘지성(至誠)’ 두(二) 절(節)을 공자(孔子)에 그것(之)을 연결하(屬)지 않(不)았다(也). 그런데(然) ‘평판 높은 이름(聲名)이 충만하(洋溢)다’ 한 단락(一段)은 중니(仲尼)가 아니(非)고(而) 누구(誰)인가(也).
<해석>
경계해 말한다. ‘오직 천하(天下)의 지극히 슬기로운 사람’은 공자(孔子)이다. ‘오직 천하(天下)의 지극히 정성스럽게 하는 사람(誠)’도 공자(孔子)이다. ‘중니(仲尼)가 본받아 계승했다’ 이하에서 ‘정성스럽고 정성스럽다. 그 인(仁)이여’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자(孔子)의 말씀을 기린다. 그러나 옛날과 지금의 여러 학파들 중에 뜻을 밝힌 적이 없다. 어찌 유감으로 생각하지 않겠는가. 위의 글에서 ‘모든 것(萬物)이 가지런히 자란다’와 작은 덕(德)은 냇물의 흐름이다’와 ‘큰 덕(德)은 힘써 교화한다’고 이른 모든 것들은 모두 공자(孔子)를 기리는 방법이다. 그러나 주자(朱子)는 하늘(天)의 도(道)에 연결해서 모두 이 ‘지성(至聖)’과 ‘지성(至誠)’ 두 절(節)을 공자(孔子)에 연결하지 않았다. 그런데 ‘평판 높은 이름이 충만하다’ 한 단락은 중니(仲尼)가 아니고 누구인가.’
<원문>
〇有容有執有敬有別。朱子謂之仁義禮智見章句似也。
<직역>
받아들임(容)이 있(有)고 처리함(執)이 있(有)고 공경함(敬)이 있(有)고 나눔(別)이 있음(有)은 주자(朱子)가 그것(之)을 인의예지(仁義禮智)라 이른(謂)다. [『장구(章句)』에 보인(見)다.] 비슷하(似)다(也).
<해석>
받아들이고 처리하고 공경하고 나누는 것을 주자(朱子)가 인의예지(仁義禮智)라 일렀다. [『장구(章句)』에 보인다.] 비슷하다.
<원문>
箴曰配天二字。極不可解。古者配天。實有其禮。不可苟稱。詩云殷之未喪師。克配上帝。文王篇詩云思文后稷。克配彼天。思文篇詩云三后在天。王配于京。下武篇周書曰肆惟殷禮陟配天。君奭文斯皆當時實有其禮。故詩人言之。孝經曰郊祀后稷以配天。宗祀文王以配上帝。忽以天與上帝。 分之爲二。此文本之緯書。朱子疑之。固不足述。而配天之禮則誠有之也。但配天有二。一是郊配。若有虞氏郊堯。夏后氏郊鯀。殷人郊冥。周人郊稷者是也。一是禘配。周禮云兆五帝於四郊。小宗伯五帝者羲農軒嚳堯舜之等。今未詳旣祭於郊則亦配天也。觀射父曰禘郊之事。不過繭栗。見楚語周定王曰禘郊之事則有全烝。見周語禘者五帝之祭也。鄭玄謂之五方天帝非也。見余春秋說。魯語展禽之言曰虞夏禘黃帝。殷周禘嚳。祭法同此則大傳所謂報本之禘也。總之孔子之德。雖爲大聖。不郊不禘。則不可曰配天。由是言之。至聖至誠二節。或非孔子之謂乎。抑配天之法。在天而不在人。孔門諸賢。明知孔子之德。優於配天。故直謂之配天與。
<직역>
경계해(箴) 말한(曰)다. ‘배천(配天)’ 두(二) 글자(字)는 매우(極) 이해할 수 없(不可解)다. 옛날(古者)의 ‘배천(配天)’에는 참으로(實) 그(其) 예(禮)가 있(有)었다. 진실로(苟) 이를(稱) 수 없(不可)다. 『시(詩)』에서 이르기(云)를 ‘은나라(殷)의(之) 사람(師)을 잃(喪)지 않음(未)에는 능히(克) 상제(上帝)와 짝했(配)다.’ [「문왕(文王)」편(篇)] 『시(詩)』에서 이르기(云)를 ‘학문의 덕(文)을 순일하게 갖춘(思) 후직(后稷)께서 능히(克) 저(彼) 하늘(天)과 짝하(配)셨다.’ [「사문(思文)」편(篇)] 『시(詩)』에서 이르기(云)를 ‘삼후(三后)께서 하늘(天)에 계시(在)고 왕(王)께서 서울(京)에(于) 짝하(配)셨다.’ [「하무(下武)」편(篇)] 「주서(周書)」에서 말하기(曰)를 ‘드디어(肆) 오직(惟) 은나라(殷)가 예(禮)로 올라(陟) 하늘(天)과 짝했(配)다.’ [「군석(君奭)」 글(文)] 이것들(斯) 모두(皆)는 마땅히(當) 당시(時) 참으로(實) 그(其) 예(禮)가 있(有)었다. 그러므로(故) 시인(詩人)이 그것(之)을 말했(言)다. 『효경(孝經)』에서 말하기(曰)를 ‘후직(后稷)에게 제사지냄(郊祀) 그것으로써(以) 하늘(天)과 짝하(配)고 문왕(文王)에게 제사지냄(宗祀) 그것으로써(以) 상제(上帝)와 짝한(配)다.’ 갑자기(忽) 하늘(天)과(與) 상제(上帝)로써(以) 그것(之)을 나누(分)어 둘(二)로 한(爲)다. 이것들(此)은 문헌(文本)의(之) 경서에 대응하여 만들어진 책(緯書)이다. 주자(朱子)는 그것(之)을 의심했(疑)다. 거듭(固) 서술함(述)이 모자라(不足)다. 그리고(而) 하늘(天)과 짝함(配)의(之) 예(禮)는 곧(則) 성(誠)에 그것(之)이 있(有)다(也). 다만(但) 배천(配天)은 둘(二)이 있(有)다. 하나(一)는 이(是) 교사를 지내(郊)는 배(配)이다. 유우씨(有虞氏)는 요임금(堯)에 교사를 지내(郊)고 하후씨(夏后氏)는 곤(鯀)에 교사를 지내(郊)고 은나라(殷) 사람(人)은 명(冥)에 교사를 지내(郊)고 주나라(周) 사람(人)은 직(稷)에 교사를 지낸(郊)다는 것(者)과 같(若)다. 이것들(是)이다(也). 하나(一)는 이(是) 오제에 제사를 지내(禘)는 배(配)이다. 『주례(周禮)』에서 이르기(云)를 ‘교외(四郊)에서(於) 오제(五帝)에게 제사를 지낸(兆)다.’ [「소종백(小宗伯)」] 오제(五帝)라는 것(者)은 희(羲)와 농(農)과 헌(軒)과 곡(嚳)과 요(堯)와 순(舜)의(之) 무리(等)이다. [지금(今)은 자세하지 않(未詳)다.] 이미(旣) 야외(祭)에서(於) 교사를 지내(郊)면 곧(則) 또한(亦) 하늘(天)과 짝한(配)다(也). 관역보(觀射父)가 말하기(曰)를 ‘체교(禘郊)의(之) 일(事)은 누에고치나 밤톨(繭栗)에 지나지 않(不過)는다.’ [「초어(楚語)」에 보인(見)다.] 주나라(周) 정왕(定王)이 말하기(曰)를 ‘체교(禘郊)의(之) 일(事)에는 곧(則) 익히지 않은 희생(全烝)이 있(有)다.’ [「주어(周語)」에 보인(見)다.] 체(禘)라는 것(者)은 오제(五帝)의(之) 제사(祭)이다(也). [정현(鄭玄)이 그것(之)을 오방천제(五方天帝)라 일렀(謂)다. 아니(非)다(也). 내(余) 「춘추설(春秋說)」에 보인(見)다.] 「노어(魯語)」에서 전금(展禽)의(之) 말씀(言)에 말하기(曰)를 ‘우나라(虞)와 하나라(夏)는 황제(黃帝)에게 제사를 지내(禘)고 은나라(殷)와 주나라(周)는 곡(嚳)에게 제사를 지낸(禘)다.’ [「제법(祭法)」과 같(同)다.] 이것(此)이 곧(則) 「대전(大傳)」의 소위(所謂) 은혜를 갚음(報本)의(之) 제사(禘)이다(也). 그것(之)을 종합하(總)면 공자(孔子)의(之) 덕(德)을 비록(雖) 훌륭한(大) 슬기(聖)로 하(爲)여도 교사를 지내(郊)지 않(不)고 오제에 제사를 지내(禘)지도 않(不)았다. 곧(則) 하늘(天)과 짝한(配)다고 말할(曰) 수 없(不可)다. 이것(是)을 말미암(由)아 그것(之)을 말하(言)면 ‘지성(至聖)’과 ‘지성(至誠)’ 두(二) 절(節)은 혹(或) 공자(孔子)의(之) 이름(謂)이 아니(非)겠는가(乎). 또한(抑) 하늘(天)과 짝함(配)의(之) 법(法)은 하늘(天)에 있(在)지(而) 사람(人)에 있(在)지 않(不)다. 공자의 제자(孔門)분들(諸賢)은 공자(孔子)의(之) 덕(德)을 분명하게 알(明知)았다. 하늘(天)과 짝함(配)에(於) 충분하(優)다. 그러므로(故) 곧(直) 그것(之)을 배천(配天)이라 이름(謂)인가(與).
<해석>
경계해 말한다. ‘배천(配天)’ 두 글자는 매우 이해할 수 없다. 옛날의 ‘배천(配天)’에는 정말로 예(禮)가 있었다. 진실로 이를 수 없다. 『시(詩)』에서 이르기 ‘은나라(殷)가 사람을 잃지 않았을 때는 능히 상제(上帝)와 짝했(配)다.’ [「문왕(文王)」편] 『시(詩)』에서 이르기를 ‘학문의 덕을 순일하게 갖춘 후직(后稷)께서 능히 저 하늘(天)과 짝하(白)셨다.’ [「사문(思文)」편] 『시(詩)』에서 이르기를 우왕과 탕왕과 문왕과 무왕께서 하늘(天)에 계시고 왕(王)께서 서울에 짝하(配)셨다.’ [「하무(下武)」편] 「주서(周書)」에서 말하기를 ‘드디어 오직 은나라(殷)가 예(禮)로 올라 하늘(天)과 짝했(配)다.’ [「군석(君奭)」 글] 이것들 모두는 마땅히 당시 참으로 예(禮)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그것을 말했다. 『효경(孝經)』에서 말하기를 ‘후직(后稷)을 제사지내서 하늘(天)과 짝하(配)고 문왕(文王)에게 제사지내서 상제(上帝)와 작한다.’ 갑자기 하늘(天)과 상제(上帝)로 나누어 둘로 했다. 이것들은 문헌 중에 경서에 대응하여 만들어진 위서라는 책인데 주자(朱子)는 그것을 의심했다. 거듭 서술해도 모자라다. 그리고 하늘(天)과 짝하(配)는 예(禮)는 곧 정성(誠)에 있다. 다만 하늘(天)과 짝한(配)다는 것은 둘이 있다. 하나는 교사를 지내(郊)는 배(配)이다. 유우씨(有虞氏)는 요임금(堯)에 교사를 지내고 하후씨(夏后氏)는 곤(鯀)에 교사를 지내고 은나라(殷) 사람은 명(冥)에 교사를 지내고 주나라(周) 사람은 직(稷)에 교사를 지낸다는 것과 같은 이것들이다. 하나는 오제에 제사를 지내(禘)는 배(配)이다. 『주례(周禮)』에서 이르기를 ‘교외에서 희와 농과 헌과 곡과 요와 순에게 제사를 지낸다.’ [「소종백(小宗伯)」] 오제(五帝)라는 것은 희(羲)와 농(農)과 헌(軒)과 곡(嚳)과 요(堯)와 순(舜)의 무리이다. [지금은 자세하지 않다.] 이미 야외에서 교사를 지내면 곧 또한 하늘(天)과 짝하(配)는 것이다. 관역보(觀射父)가 말하기를 ‘체교(禘郊)의 일은 누에고치나 밤톨같이 작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초어(楚語)」에 보인다.] 주나라(周) 정왕(定王)이 말하기를 ‘체교(禘郊)에는 곧 익히지 않은 희생이 있다.’ [「주어(周語)」에 보인다.] 체(禘)라는 것은 오제(五帝)의 제사이다. [정현(鄭玄)이 그것을 동쪽의 청제와 서쪽의 백제와 남쪽의 적제와 북족의 흑제와 중앙의 황제라 일렀는데 아니다. 내 「춘추설(春秋說)」에 보인다.] 「노어(魯語)」에서 전금(展禽)의 말씀 중에 말하기를 ‘우나라(虞)와 하나라(夏)는 황제(黃帝)에게 제사를 지내고 은나라(殷)와 주나라(周)는 곡(嚳)에게 제사를 지낸다.’ [「제법(祭法)」과 같다.] 이것이 곧 「대전(大傳)의 이른바 은혜를 갚는 제사이다. 그것을 종합하면 공자(孔子)의 덕(德)을 비록 훌륭한 슬기(聖)로 하여도 교사를 지내(郊)지 않고 오제에 제사를 지내(禘)지도 않았다. 곧 하늘(天)과 짝한(配)다고 말할 수 없다. 이를 말미암아 말하면 ‘지성(至聖)’과 ‘지성(至誠)’ 두 절(節)은 혹 공자(孔子)의 이름이 아니겠는가. 또한 하늘(天)과 짝하(配)는 법은 하늘(天)에 있지 사람(人)에 있지 않다. 공자(孔子)의 제자들은 공자(孔子)의 덕(德)을 분명하게 알았으니 하늘(天)과 짝한다기(配)에 충분해서 곧 하늘(天)과 짝했(配)다고 이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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