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朱子曰命猶令也。率循也。
<직역>
주자(朱子)가 말하기(曰)를 “명(命)은 령(令)과 같(猶)다(也). 솔(率)은 순(循)이다(也).”
<해석>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명(命)은 명령과 같고 솔(率)은 좇음이다.”
<해설>
명(命) = 령(令)
솔(率) = 따름(循)
명(命)과 솔(率)에 대한 정의는 정약용 선생님도 주자(朱子)를 따르고 있다. 다만 명(命)은 조금 주의해야 하는데 명(命)을 주자(朱子)는 명령(命令)으로 이해한 반면 정약용 선생님은 ‘가르침’의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명령(命令)’에 대한 부분은 인용하고 있지 않고 있는데 이런 의도인 것 같다.
<원문>
〇箴曰天性二字。始發於西伯戡黎不虞天性一語。易傳盡性之句。孟子知性之訓。皆後於是也。湯誥云降衷下民。若有恆性。僞也。
<직역>
경계해(箴) 말한(曰)다. ‘천성(天性)’ 두(二) 글자(字)는 「서백감려(西伯戡黎)」의 ‘불우천성(不虞天性)’이라는 한(一) 말(語)에서(於) 시발(始發)했다. 『역전(易傳)』 ‘진성(盡性)’의(之) 글귀(句)와 『맹자(孟子)』의 ‘지성(知性)’의(之) 가르침(訓)은 모두(皆) 이것(是)에서(於) 뒤(後)이다(也). [「탕고(湯誥)」에서 이르기(云)를 ‘하민(下民)에게 충(衷)을 내렸(降)다. 항성(恆性)이 있는 듯하(若有)다’는 거짓(僞)이다(也).]
<해석>
경계해 말한다. ‘천성(天性)’ 두 글자는 「서백감려(西伯戡黎)」의 ‘천성(天性)을 즐기(虞)지 못하(不)다’라는 한 마디 말에서 처음 쓰였다. 『역전(易傳)』의 ‘성(性)을 다하다’의 글귀와 『맹자(孟子)』의 ‘성(性)을 안다’의 가르침은 모두 이후에 나온 말이다. [「탕고(湯誥)」에서 이르기를 ‘백성들에게 정성스러운 마음을 내렸으니 변하지 아니하는 성(性)이 있는 듯하다’는 거짓이다.]
<원문>
此經天命之性。卽祖伊所言之天性也。然據性字本義而言之。則性者心之所嗜好也。召誥云節性唯日其邁。古傳今傳。皆以爲食色之欲。孟子曰動心忍性。王制云修六禮以節民性。皆以嗜好爲性也。天命之性。亦可以嗜好言。蓋人之胚胎旣成。天則賦之以靈明無形之體。而其爲物也。樂善而惡惡。余有先諱每云樂善。好德而恥汚。斯之謂性也。斯之謂性善也。性旣如是。故毋用拂逆。毋用矯揉。只須率以循之。聽其所爲。自生至死。遵此以往。斯之謂道也。但道路爲物。舍之不治則蓁莽阻塞。莫適所向。必有亭堠之官。爲之治之繕之開之導之。使行旅弗迷其方。然後方可以達其所往。聖人之牖導衆人。其事相類。斯之謂敎也。敎者繕治道路者也。
<직역>
이(此) 경(經)의 ‘천명지성(天命之性)’은 곧(卽) 조이(祖伊)가 말한(言) 바(所)의(之) ‘천성(天性)’이다(也). 그런데(然) ‘성(性)’이라는 글자(字)의 본의(本義)에 근거하(據)면서(而) 그것(之)을 말하(言)면 곧(則) 성(性)이란 것(者)은 마음(心)의(之) 기호(嗜好)인 바(所)이다(也). 「소고(召誥)」에서 이르기(云)를 ‘성(性)에 알맞게 하(節)여 오직(唯) 나날이(日) 마땅히(其) 힘쓴(邁)다.’ [예전(古)에 전하여졌(傳)고 지금(今)도 전하여진(傳)다. 모두(皆) 식색(食色)의(之) 욕망(欲)이라 여긴(以爲)다]. 맹자(孟子)가 말하기(曰)를 ‘마음(心)을 움직이(動)고 성(性)을 참(忍)는다.’ 「왕제(王制)」에서 이르기(云)를 ‘육례(六禮)를 닦음(修) 그것으로써(以) 백성(民)의 성(性)에 알맞게 한(節)다.’ 모두(皆) 기호(嗜好)로써(以) 성(性)으로 했(爲)다(也). 천명지성(天命之性) 또한(亦) 기호(嗜好)의 말씀(言)으로 할 수 있(可以)다. 모든(蓋) 사람(人)의(之) 배태(胚胎)가 이미(旣) 이루어지(成)면 하늘(天)은 곧(則) 영명(靈明)하고 무형(無形)의(之) 체(體)로써(以) 그것(之)을 나누어 준(賦)다. 그리고(而) 그(其) 물(物)됨(爲)은(也) 선(善)을 즐기(樂)면서(而) 악(惡)을 싫어하(惡)고 [나(余)는 조상(先)의 휘(諱)가 있(有)다. 늘(每) 선(善)을 즐긴(樂)다고 이른(云)다.] 덕(德)을 좋아하(好)면서(而) 더러움(汚)을 부끄러워한(恥)다. 이것(斯)의(之) 이름(謂)이 성(性)이다(也). 이것(斯)의(之) 이름(謂)이 성선(性善)이다(也). 성(性)은 원래(旣) 이(是)와 같다(如). 그러므로(故) 불역(拂逆)함을 말미암(用)지 말(毋)고 교유(矯揉)함을 말미암(用)지 말(毋)라. 다만(只) 모름지기(須) 그것(之)을 의지함(循)으로써(以) 따르(率)고 그(其) 소위(所爲)를 받아들(聽)인다. 태어나(生)면서부터(自) 죽음(死)에 이르기(至)까지 이(此) 향함(往)으로써(以) 좇(遵)는다. 이것(斯)의(之) 이름(謂)이 도(道)이다(也). 다만(但) 도로(道路)의 물(物)됨(爲)은 그것(之)을 내버려두(舍)고 다스리(治)지 않(不)는다면 곧(則) 나무와 풀숲이 우거져서(蓁莽) 조색(阻塞)한다. 소향(所向)에 감(適)이 없(莫)다. 반드시(必) 정자(亭) 망대(堠)의(之) 관리(官)가 있(有)어 그것(之)을 만들(爲)고 그것(之)을 관리하(治)고 그것(之)을 보수하(繕)고 그것(之)을 열(開)고 그것(之)을 통하게 한(導)다. 행려(行旅)로 하여금(使) 그(其) 방향(方)을 헷갈리(迷)지 않(弗)도록 한다. 연후(然後)에 함께(方) 그(其) 향하(往)는 바(所)로 통할(達) 수 있(可以)다. 성인(聖人)의(之) 깨우침(牖)은 중인(衆人)을 인도한(導)다. 그(其) 일(事)은 무리(類)를 돕(相)는다. 이것(斯)의(之) 이름(謂)이 교(敎)이다(也). 교(敎)라는 것(者)은 도로(道路)를 고치(繕)고 관리하(治)는 것(者)이다(也).
<해석>
이 경(經)의 ‘천명지성(天命之性)’은 곧 조이(祖伊)가 말했던 ‘천성(天性)’이다. 그런데 ‘성(性)’이라는 글자의 원래 뜻에 근거해서 말하면 성(性)이라는 것은 마음(心)의 기호(嗜好)이다. 「소고(召誥)」에서 이르기를 “성(性)에 알맞게 하여 오직 나날이 마땅히 힘쓴다.’ [예전에도 전하여졌고 지금도 전하여지는데 모두 식색(食色)의 욕망(欲)이라 여긴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마음(心)을 움직이고 성(性)을 참는다.’ 「왕제(王制)」에서 이르기를 ‘육례(六禮)를 닦아서 백성의 성(性)에 알맞게 한다.’ 모두 기호(嗜好)를 성(性)이라고 말한 것이다. 천명지성(天命之性) 또한 기호(嗜好)로 말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의 잉태가 이미 이뤄질 때 하늘은 곧 영명(靈明)하고 무형(無形)의 체(體)를 나누어 준다. 그리고 그 특성은 선(善)을 즐기면서 악(惡)을 싫어하고 [내 조상님의 이름을 피하기 위해 늘 선(善)을 즐긴다고 이른다.] 덕(德)을 좋아하면서 더러움을 부끄러워한다. 이것이 성(性)이나 성선(性善)이라 이르는 것이다. 성(性)은 원래 이와 같다. 그러므로 어기지 말고 고쳐 쓰지 말라. 다만 모름지기 그것을 의지해서 따르고 하는 일을 받아들여라. 태어나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 방향을 좇는다. 이것이 도(道)라 이르는 것이다. 다만 도로(道路)의 특성은 내버려두고 다스리지 않으면 곧 나무와 풀숲이 우거져서 막히고 향하는 곳에 갈 수 없다. 반드시 정자 망대의 관리가 있어서 그것을 만들고 관리하고 보수하고 열고 통하게 해야한다. 여행자로 하여금 그 방향을 헷갈리지 않도록 하고 그러한 뒤에야 함께 그 가려는 곳으로 통할 수 있다. 성인(聖人)의 깨우침은 여러 사람을 인도하고 그 일은 무리를 돕는다. 이것이 교(敎)라 이르는 것이다. 교(敎)라는 것은 도로(道路)를 고치고 관리하는 것이다.
<원문>
〇敎者五敎也。下文曰修身以道。修道以仁。哀公章仁者人倫之成德也。天之所以察人善惡。恆在人倫。故人之所以修身事天。亦以人倫致力。下文所謂五達道。卽修道之敎也。人能於父子君臣夫婦昆弟朋友之際。盡其心之中和。則修道者也。
<직역>
교(敎)라는 것(者)은 오교(五敎)이다(也). 아래(下) 글(文)에서 말하기(曰)를 “도(道)로써(以) 수신(修身)한다. 인(仁)으로써(以) 수도(修道)한다.” [‘애공(哀公)’장(章)] 인(仁)이란 것(者)은 인륜(人倫)의(之) 성덕(成德)이다(也). 하늘(天)의(之) 사람(人)의 선악(善惡)을 살피(察)는 방법(所以)은 항상(恆) 인륜(人倫)에 있(在)다. 그러므로(故) 사람(人)의(之) 수신(修身)하는 방법(所以)은 하늘(天)을 섬김(事)이다. 또한(亦) 인륜(人倫)으로써(以) 치력(致力)한다. 아래(下) 글(文)에 소위(所謂) ‘오달도(五達道)’는 곧(卽) 수도(修道)의(之) 교(敎)이다(也). 사람(人)은 부자(父子)와 군신(君臣)과 부부(夫婦)와 곤제(昆弟)와 붕우(朋友)의(之) 사귐(際)에(於) 능할 수 있(能)다. 그(其) 마음(心)의(之) 중(中)과 화(和)를 다하(盡)면 곧(則) 수도(修道)한 것(者)이다(也).
<해석>
교(敎)라는 것은 오교(五敎)이다. 아래 글에서 말하기를 “도(道)로써 수신(修身)한다. 인(仁)으로써 수도(修道)한다.” [‘애공(哀公)’장(章)] 인(仁)이란 것은 인륜(人倫)의 완성된 덕(德)이다. 하늘(天)이 사람의 선악(善惡)을 살피는 방법은 인륜(人倫)에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수신(修身)하는 방법은 하늘(天)을 섬기는 것이다. 또한 인륜(人倫)으로써 힘쓴다. 아래 글에 이른바 ‘오달도(五達道)’는 곧 수도(修道)의 교(敎)이다. 사람은 부자(父子)와 군신(君臣)과 부부(夫婦)와 형제(昆弟)와 벗(朋友)과 사귈 수 있다. 그 마음(心)의 중(中)과 화(和)를 다하면 곧 수도(修道)한 것이다.
<해설>
부자(父子)와 군신(君臣)과 부부(夫婦)와 곤제(昆弟)와 붕우(朋友)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떤 이름으로든 맺는 인간관계이다. 그리고 위에서 교(敎)는 도로(道路)를 고치고 바로잡는 것이라고 했다. 성인(聖人)의 말씀은 인륜(人倫)에 대한 것으로 잘못되기 쉬운 것들에서 성(性)을 따라 올바른 도(道)를 좇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사천(事天)이라는 표현도 논란의 여지가 많다. 직역하면 ‘하늘(天)을 섬긴(事)다’이다. 역시 서양의 천주교와 같은 신학을 연상시키게 만드는 표현이다. 그러나 정약용 선생님의 하늘(天)과 하느님은 엄연한 차이가 있는데, 정약용 선생님이 하늘(天)을 섬긴다는 것은 ‘잘 모신다’, ‘공경한다’이지 ‘복종하다’가 아니다. 즉 하늘(天)은 정말로 놀랍고 대단하지만 하늘(天)이 모든 것을 하도록 냅둔채 따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天)이 하는 일(載)을 결국 인간이 대신할 수 있고 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께 절대적으로 복종한다는 의미와는 차이가 있다.
아래는 오륜(五倫) 중에서 특히나 말이 많은 네이버 한자사전(통념)과 부부유별(夫婦有別)에 대한 정약용 선생님의 관점이다.
네이버 한자사전
부부유별(夫婦有別) : 「오륜(五倫)의 하나로, 남편(男便)과 아내는 분별(分別)이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부부(夫婦) 사이에는 인륜(人倫)상 각각(各各) 직분(職分)이 있어 서로 침범(侵犯)하지 못할 구별(區別)이 있음
『소학지언(小學枝言)』 - 일부 발췌
〇夫婦有別者。各配其匹。不相瀆亂也。禮曰娶于異姓。所以附遠厚別也。郊特牲禮曰男女非有行媒。不相知名。非受幣。不交不親。故日月以告君。齊戒以告鬼神。爲酒食以召鄕黨僚友。以厚其別也。曲禮文禮曰執贄以相見。敬章別也。疏云壻親迎入門而後。與婦相見。以明夫婦有別。男女有別然後父子親。父子親然後義生。義生然後禮作。禮作然後萬物安。無別無義。禽獸之道也。郊特牲又曰章民之別。使民無嫌。
〇詩傳稱雎鳩摯而有別。亦謂其乘居而匹處。各有定配也。禮曰昏姻之禮。所以分男女之別也。
〇今人以嚴內外之分。爲夫婦有別。誤。
春秋傳史克之言。以父義母慈兄友弟恭子孝。爲五敎。梅氏書傳皆如是說。中庸之五達道。似與孟子所言五倫同。而彼云兄弟。此云長幼。又不同。
〇부부유별(夫婦有別)이라는 것(者)은 각자(各) 그(其) 배우자(匹)와 짝하(配)고 서로(相)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여 인륜을 더럽히고 어지럽히(瀆亂)지 않음(不)이다(也). 『예(禮)』에서 말하기(曰)를 “이성(異姓)에게(于) 장가듦(娶)은 소원함(遠)을 붙이(附)고 조직(別)을 두터이하(厚)는 방법(所以)이다(也).” [「교특생(郊特牲)」] 『예(禮)』에서 말하기(曰)를 “남녀(男女)는 중매를 함(行媒)이 있(有)지 않(非)다면 서로(相) 이름(名)을 알(知)지 못한(不)다. 폐백(幣)을 받(受)지 않(非)으면 사귀(交)지 않(不)고 친하게 지내(親)지 않(不)는다. 그러므로(故) 날과 달(日月) 그것으로써(以) 임금(君)에게 고하(告)고 제계(齊戒) 그것으로써(以) 귀신(鬼神)에게 고하(告)고 술과 밥(酒食)을 만듦(爲) 그것으로써(以) 자기가 났던 시골마을(鄕黨)의 동료인 벗(僚友)을 초대하(召)여 그것으로써(以) 그(其) 조직(別)을 두터이한(厚)다(也).” [「곡례(曲禮)」의 글(文)] 『예(禮)』에서 말하기(曰) “폐백(贄)을 가지(執)고 그것으로써(以) 서로 만나 봄(相見)은 정중히(敬) 구별(別)을 밝힘(章)이다(也).” [소(疏)에서 이르기(云)를 “사내(壻)가 신부네 집에 가서 신부를 직접 맞(親迎)고 문(門)에 들어간(入) 이후(而後)에 아내(婦)와(與) 서로 만나 봄(相見) 그것으로써(以) 부부유별(夫婦有別)을 밝힌(明)다.”] 남녀유별(男女有別) 연후(然後)에 부자(父子)가 친하(親)고 부자(父子)가 친한(親) 연후(然後)에 의(義)가 나(生)고 의(義)가 난(生) 연후(然後)에 예(禮)가 일어나(作)고 예(禮)가 일어난(作) 연후(然後)에 만물(萬物)이 편안하(安)다. 구별(別)이 없(無)고 의(義)가 없(無)다면 금수(禽獸)의(之) 도(道)이다(也).” [「교특생(郊特牲)」] 또한(又) 말하기(曰)를 “백성(民)의(之) 구별(別)을 밝힘(章)은 백성(民)으로 하여금(使) 혐의가 없도록 한(無嫌)다.”
〇『시전(詩傳)』에서 물수리(雎鳩)는 도타(摯)우면서(而) 구별(別)이 있(有)다고 일컫(稱)고 또한(亦) 그것(其)이 쌍쌍이(乘) 살(居)면서(而) 짝(匹)과 살아가(處)니 각자(各) 정해진(定) 짝(配)이 있(有)다고 이른(謂)다(也). 『예(禮)』에서 말하기(曰)를 “혼인(昏姻)의(之) 예(禮)는 남녀(男女)의(之) 구별(別)을 나누(分)는 방법(所以)이다(也).”
〇지금 세상의 사람(今人)은 내외(內外)의(之) 다름(分)을 엄격하게 함(嚴)으로써(以) 부부유별(夫婦有別)로 한(爲)다. 그릇된(誤)다.
『춘추관(春秋傳)』의 사관(史)인 극(克)의(之) 말씀(言)에서 아버지(父)의 의(義)와 어머니(母)의 자(慈)와 형(兄)의 우(友)와 아우(弟)의 공(恭)과 자식(子)의 효(孝)로써(以) 오교(五敎)로 한(爲)다. 매씨(梅氏)의 「서전(書傳)」은 모두(皆) 이(是) 말씀(說)과 같(如)다. 『중용(中庸)』의(之) 오달도(五達道)는 맹자(孟子)의 오륜(五倫)을 말하(言)는 바(所)와(與) 같(同)은 것 같(似)다. 그러나(而) 저쪽(彼)은 형제(兄弟)라 이르(云)고 이쪽(此)은 장유(長幼)를 이르(云)니 또한(又) 같(同)지 않(不)다.
부부유별(夫婦有別) = 남편은 다른 남자들과 다르고 아내는 다른 여자와 다르다, 각자 자신의 짝을 짝으로 한다.
<원문>
箴曰人方以靈明之全體爲性。其必以嗜好爲性者。何也。人有恆言曰我性嗜膾炙。曰我性惡饐敗。曰我性好絲竹。曰我性惡蛙聲。人固以嗜好爲性也。故孟子論性善之理。輒以嗜好明之。見告子盡心孔子引秉彝好德之詩。以證人性。舍嗜好而言性者。非洙泗之舊也。
<직역>
경계해(箴) 말한(曰)다. 사람들(人)은 모두(方) 영명(靈明)의(之) 전체(全體)로써(以) 성(性)으로 한(爲)다. 그(其) 반드시(必) 기호(嗜好)로써(以) 성(性)으로 한(爲)다는 것(者)은 어째서(何)인가(也). 사람들(人)이 항언(恆言)이 있(有)어 말하기(曰)를 ‘내(我) 성(性)은 회자(膾炙)를 즐긴(嗜)다.’ 말하기(曰)를 ‘내(我) 성(性)은 쉬(饐)고 썩음(敗)을 싫어한(惡)다.’ 말하기(曰)를 ‘내(我) 성(性)은 사죽(絲竹)을 좋아한(好)다.’ 말하기(曰)를 ‘내(我) 성(性)은 와성(蛙聲)을 싫어한(惡)다.’ 사람들(人)은 항상(固) 기호(嗜好)로써(以) 성(性)으로 한(爲)다(也). 그러므로(故) 맹자(孟子)는 성선(性善)의(之) 이치(理)를 논했(論)다. 언제나(輒) 기호(嗜好)로써(以) 그것(之)을 밝혔(明)다. [「고자(告子)」와 「진심(盡心)」에 보인(見)다.] 공자(孔子)가 병이호덕(秉彝好德)의(之) 시(詩)를 인용했(引)다. 그것으로써(以) 인성(人性)을 증명했(證)다. 기호(嗜好)를 버리(舍)고(而) 성(性)을 말하(言)는 것(者)은 수사(洙泗)의(之) 오래된 사례(舊)가 아니(非)다(也).
<해석>
경계해 말한다. 사람들은 모두 영명(靈明) 전체를 성(性)으로 한다. 그 반드시 기호(嗜好)로써 성(性)으로 해야 한다는 것은 어째서인가. 사람들이 늘 하는 말이 있는데 말하기를 ‘내 성(性)은 회와 구운 고기를 즐긴다.’ 말하기를 ‘내 성(性)은 쉬고 썩은 것을 싫어한다.’ 말하기를 ‘내 성(性)은 거문고와 퉁소의 소리를 좋아한다.’ 말하기를 ‘내 성(性)은 개구리 소리를 싫어한다.’ 사람들은 항상 기호(嗜好)로써 성(性)으로 한다. 그러므로 맹자(孟子)는 성선(性善)의 이치를 논했는데 언제나 기호(嗜好)로써 그것을 밝혔다. [「고자(告子)」와 「진심(盡心)」에 보인다.] 공자(孔子)가 병이호덕(秉彝好德)의 시(詩)를 해서 인성(人性)을 증명했다. 기호(嗜好)를 버리고 성(性)을 말하는 것은 공자가 말하던 것이 아니다.
<해설>
『시경(詩經)』 「증민(烝民)」 - 병이호덕(秉彝好德)
天生烝民(천생증민) : 하늘(天)이 많(烝)은 백성(民)을 낳(生)으니
有物有則(유물유칙) : 물(物)이 있(有)으면 법칙(則)이 있(有)다.
民之秉彛(민지병이) : 백성(民)의(之) 떳떳함(彛)을 잡(秉)음은
好是懿德(호시의덕) : 이(是) 아름다(懿)운 덕(德)을 좋아한(好)다.
<원문>
〇荀卿言性惡。揚雄言善惡渾。其謂之性善者。何也。性若不善。安得率之。若善惡渾。安得率之。必其物純善無惡。故可以率之循之。如鋸者之循繩墨。濟者之循橋梁。若其中微有不善。聖人立敎。必當曰違之拂之。改之揉之。豈得以率性爲道乎。
<직역>
순경(荀卿)은 성악(性惡)을 말했(言)다. 양웅(揚雄)은 선악(善惡)의 뒤섞임(渾)을 말했(言)다. 그(其)가 그것(之)을 성선(性善)이라 이른(謂) 것(者)은 어째서(何)인가(也). 성(性)이 만약(若) 불선(不善)하다면 그것(之)을 따름(率)을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安得). 만약(若) 선악(善惡)이 뒤섞였(渾)다면 그것(之)을 따름(率)을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安得). 반드시(必) 그(其) 물(物)은 오로지(純) 선(善)하고 악(惡)이 없(無)다. 그러므로(故) 그것(之)을 따르(率)고 그것(之)을 좇(循)을 수 있(可以)다. 톱질하(鋸)는 사람(者)의(之) 승묵(繩墨)을 좇음(循)과 건너(濟)는 사람(者)의(之) 교량(橋梁)을 좇음(循)과 같(如)다. 만약(若) 그(其) 가운데(中)에 조금(微)의 불선(不善)이 있(有)어 성인(聖人)이 교(敎)를 세움(立)에 반드시(必) 마땅히(當) ‘그것(之)을 피하(違)고 그것(之)을 거스르(拂)고 그것(之)을 고치(改)고 그것(之)을 휘게 하(揉)라’고 말하(曰)면 어찌(豈) 솔성(率性)으로써(以) 도(道)로 함(爲)을 얻(得)겠는가(乎).
<해석>
순경(荀卿)은 성악(性惡)을 말했다. 양웅(揚雄)은 선악(善惡)이 뒤섞였다고 말했다. 그가 성선(性善)이라 이른 것은 어째서인가. 성(性)이 만약 불선(不善)하다면 어떻게 따를 수 있겠는가. 만약 선악(善惡)이 뒤섞였다면 어떻게 따를 수 있겠는가. 반드시 그것은 오로지 선(善)하고 악(惡)이 없다. 그러므로 그것을 따르고 좇을 수 있다. 톱질하는 사람의 승묵을 좇음이나 건너는 사람의 교량을 좇음과 같다. 만약 그 가운데에 조금이라도 불선(不善)이 있어 성인(聖人)이 교(敎)를 세움에 반드시 마땅히 ‘그것을 피하고 거스르고 고치고 휘게 하라’고 말해야 한다면 어찌 솔성(率性)을 도(道)로 할 수 있겠는가.
<원문>
〇人恆陷於惡。其謂之性善者何也。人每行一善事。其心必愉然以快。豈非適性故愉然乎。人每行一惡事。必欿然自蹙。豈非拂性故欿然乎。赤子入井。必急往援出而後安於心。鶂肉當前。必固辭不食而後安於心。班斑同行。必分其重任然後安於心。善人被誣。必㬥其寃枉然後安於心。凡遇此而不能行者。皆恧蹙不安。其安與不安。豈非適性與拂性之故乎。故曰率性可以爲善。
<직역>
사람(人)은 항상(恆) 악(惡)에(於) 빠진(陷)다. 그(其)가 그것(之)을 성선(性善)이라 이른(謂) 것(者)은 어째서(何)인가(也). 사람(人)은 늘(每) 하나(一)의 선(善)한 일(事)을 하(行)면 그(其) 마음(心)은 반드시(必) 기뻐함(快)에 따라(以) 즐거운(愉) 듯하(然)다. 어찌(豈) 성(性)에 맞(適)으므로(故) 즐거운(愉) 듯하(然)지 않(非)겠는가(乎). 사람(人)은 늘(每) 하나(一)의 악(惡)한 일(事)을 하(行)면 반드시(必) 곤궁함(蹙)에 따라(自) 서운한(欿) 듯하(然)다. 어찌(豈) 성(性)을 거스르(拂)므로(故) 서운한(欿) 듯하(然)지 않(非)겠는가(乎). 적자(赤子)가 우물(井)에 빠지(入)면 반드시(必) 급히(急) 향하(往)여 도우(援)러 나간(出) 이후(而後)에야 마음(心)에서(於) 편안하(安)다. 거위(鶂)고기(肉)를 당면(當前)하면 반드시(必) 고사(固辭)하고 불식(不食)한 이후(而後)에야 마음(心)에서(於) 편안하(安)다. 대등한(班) 모양(斑)으로 동행(同行)하면 반드시(必) 그(其) 무거(重)운 보따리(任)를 나눈(分) 연후(然後)에야 마음(心)에서(於) 편안하(安)다. 선(善)한 사람(人)이 속임(誣)을 당하(被)면 반드시(必) 그(其) 원통한(寃) 누명(枉)을 해친(㬥) 연후(然後)에야 마음(心)에서(於) 편안하(安)다. 무릇(凡) 이(此)를 만나(遇)면서(而) 능히(能) 행하(行)지 않(不)은 사람(者)은 모두(皆) 부끄러워하(恧)고 삼가(蹙)고 불안(不安)하다. 그(其) 편함(安)과(與) 불안(不安)은 어찌(豈) 성(性)에 맞음(適)과(與) 성(性)을 거스름(拂)의(之) 까닭(故)이 아니(非)겠는가(乎). 그러므로(故) 말하기(曰)를 ‘솔성(率性)하면 선(善)을 할(爲) 수 있(可以)다.’
<해석>
사람은 항상 악(惡)에 빠진다. 그가 그것을 성선(性善)이라 이른 것은 어째서인가. 사람은 늘 하나의 선(善)한 일을 하면 그 마음(心)은 반드시 기뻐하여 즐거운 듯하다. 어찌 성(性)에 맞는데 즐겁지 않겠는가. 사람은 늘 하나의 악(惡)한 일을 하면 반드시 곤궁하여 서운한 듯하다. 어찌 성(性)을 거스르는데 서운하지 않겠는가. 갓난아기가 우물에 빠지면 반드시 급히 향하여 도우러 나간 이후에야 마음(心)에서 편안하다. 거위고기를 눈앞에서 보면 반드시 사양하고 먹지 아니한 이후에야 마음(心)에서 편안하다. 나란히 동행하면 반드시 그 무거운 보따리를 나눈 연후에야 마음(心)에서 편안하다. 선(善)한 사람이 속임을 당하면 반드시 그 원통한 누명을 해결한 연후에야 마음(心)에서 편안하다. 무릇 이를 만나면서 능히 행하지 않은 사람은 모두 부끄러워하고 삼가고 불안해한다. 그 편함과 불안은 어찌 성(性)에 맞거나 성(性)을 거스른 까닭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솔성(率性)하면 선(善)을 할 수 있다.’
<원문>
〇率性之謂道。故性之所發。謂之道心。性生於心。故從心從生。道心常欲爲善。又能擇善。一聽道心之所欲爲。循其欲玆之謂率性。率性者。循天命也。不義之食在前。口腹之慾溢發。心告之曰勿食哉。是不義之食也。我乃順其所告。郤之勿食。玆之謂率性。率性者。循天命也。四體薾然。常欲疲臥。道心告之曰勿偃哉。是怠慢之習也。我乃順其所告。蹶然起坐。玆之謂率性。率性者。循天命也。
<직역>
솔성(率性) 그것(之)을 도(道)라 이른(謂)다. 그러므로(故) 성(性)의(之) 발(發)한 바(所) 그것(之)을 도심(道心)이라 이른(謂)다. [성(性)은 마음(心)에서(於) 난(生)다. 그러므로(故) 마음(心)을 따르(從)고 생(生)을 따른(從)다.] 도심(道心)은 항상(常) 선(善)을 하(爲)고자 한(欲)다. 또한(又) 능히(能) 택선(擇善)한다. 오로지(一) 도심(道心)의(之) 하(爲)고자 하(欲)는 바(所)를 듣(聽)는다. [그(其) 욕망(欲)을 좇(循)는다.] 이때(玆) 그것(之)을 솔성(率性)이라 이른(謂)다. 솔성(率性)이라는 것(者)은 천명(天命)을 좇음(循)이다(也). 불의(不義)의(之) 음식(食)이 앞(前)에 있(在)다면 구복(口腹)의(之) 욕심(慾)이 넘치(溢)게 일어난(發)다. 마음(心)이 그것(之)을 알려(告) 말하기(曰)를 ‘먹(食)지 말(勿)라(哉). 이것(是)은 불의(不義)의(之) 음식(食)이다(也).’ 나(我)는 이에(乃) 그(其) 고하(告)는 바(所)를 좇(順)아 구멍(郤)의(之) 먹(食)지 않(勿)는 이때(玆) 그것(之)을 솔성(率性)이라 이른(謂)다. 솔성(率性)이라는 것(者)은 천명(天命)을 좇음(循)이다(也). 사체(四體)가 피곤한(薾) 듯하(然)여 항상(常) 지쳐(疲) 눕(臥)고자 한(欲)다. 도심(道心)이 그것(之)을 알려(告) 말하기(曰)를 ‘눕(偃)지 말(勿)라(哉). 이것(是)은 태만(怠慢)의(之) 버릇(習)이다(也).’ 나(我)는 이에(乃) 그(其) 고하(告)는 바(所)를 좇(順)아 궐연(蹶然)하고 기좌(起坐)한다. 이때(玆) 그것(之)을 솔성(率性)이라 이른(謂)다. 솔성(率性)이라는 것(者)은 천명(天命)을 좇음(循)이다(也).
<해석>
솔성(率性)을 도(道)라 이른다. 그러므로 성(性)의 발한 바를 도심(道心)이라 이른다. [성(性)은 마음(心)에서 난다. 그러므로 마음(心)을 따르고 생(生)을 따른다.] 도심(道心)은 항상 선(善)을 하고자 한다. 또한 능히 선(善)을 고른다. 오로지 도심(道心)의 하고자 하는 바를 듣는다. [그 욕망을 좇는다.] 이때 솔성(率性)이라 이른다. 솔성(率性)이라는 것은 천명(天命)을 좇음이다. 옳지 않은 음식이 앞에 있다면 입과 배의 욕심이 넘치게 일어난다. 마음(心)이 알려 말하기를 ‘먹지 말라. 이것은 옳지 않은 음식이다.’ 나는 이에 그 고하는 바를 좇아 입과 배를 따라 먹지 않는 이때 솔성(率性)이라 이른다. 솔성(率性)이라는 것은 천명(天命)을 좇음이다. 사체(四體)가 피곤한듯이 항상 지쳐 눕고자 한다. 도심(道心)이 알려 말하기를 ‘눕지 말라. 이것은 태만의 버릇이다.’ 나는 이에 그 고하는 바를 좇아 벌떡 일어나고 기좌한다. 이때 솔성(率性)이라 이른다. 솔성(率性)이라는 것은 천명(天命)을 좇음이다.
<원문>
〇天於賦生之初。有此命。又於生居之日。時時刻刻。續有此命。天不能諄諄然命之。非不能也。天之喉舌。寄在道心。道心之所儆告。皇天之所命戒也。人所不聞。而巳獨諦聽。莫詳莫嚴。如詔如誨。奚但諄諄已乎。事之不善。道心愧之。愧怍之發。諄諄乎天命也。行有不善。道心悔之。悔恨之發。諄諄乎天命也。詩云天之牖民。如塤如箎。非是之謂乎。對越上帝之只在方寸。正亦以是。求天命於圖籙者。異端荒誕之術也。求天命於本心者。聖人昭事之學也。
<직역>
하늘(天)이 삶(生)의(之) 시작(初)을 줌(賦)에(於) 이(此) 명(命)이 있(有)다. 또한(又) 평상시(居)의(之) 나날(日)을 살아감(生)에(於) 시시각각(時時刻刻) 계속(續) 이(此) 명(命)이 있(有)다. 하늘(天)은 순순(諄諄)한 듯(然)이 그것(之)을 명함(命)이 불능(不能)하다. 비불능(非不能)이다(也). 하늘(天)의(之) 후설(喉舌)은 도심(道心)에 위임해(寄) 있(在)다. 도심(道心)의(之) 경계하(儆)고 알리(告)는 바(所)는 황천(皇天)의(之) 명(命)의 경계하(戒)는 바(所)이다(也). 타인(人)이 듣(聞)지 않(不)는 바(所)이나(而) 자기(己)는 홀로(獨) 체청(諦聽)한다. 속임(詳)이 없(莫)고 엄함(嚴)이 없(莫)다. 고하(詔)는 듯하(如)고 가르치(誨)는 듯하(如)다. 어찌(奚) 다만(但) 순순(諄諄)할뿐(已)이겠는가(乎). 일(事)의(之) 불선(不善)은 도심(道心)이 그것(之)을 부끄러워한(愧)다. 괴작(愧怍)의(之) 발(發)함은 천명(天命)에서(乎) 순순(諄諄)한다(也). 행함(行)에 불선(不善)함이 있(有)다면 도심(道心)은 그것(之)을 뉘우친(悔)다. 회한(悔恨)의(之) 발(發)함은 천명(天命)에서(乎) 순순(諄諄)한다(也). 『시경(詩)』에서 이르기(云)를 ‘하늘(天)의(之) 유민(牖民)은 질나발(塤)과 같(如)고 피리(篪)와 같다(如).’ 이것(是)의(之) 일컬(謂)음이 아니(非)겠는가(乎). ‘상제(上帝)를 대월(對越)함의(之) 하나(只)는 방촌(方寸)에 있(在)다.’ 또한(亦) 이것(是)으로써(以) 옳(正)다. 도록(圖籙)에서(於) 천명(天命)을 구하(求)는 것(者)은 이단(異端)의 황탄(荒誕)의(之) 재주(術)이다(也). 본심(本心)에서(於) 천명(天命)을 구하(求)는 것(者)은 성인(聖人)의 소사(昭事)의(之) 배움(學)이다(也).
<해석>
하늘(天)이 삶(生)의 시작을 줄 때 이 명(命)이 있다. 또한 평상시의 나날을 살아가면서 매 시각마다 계속 이 명(命)이 있다. 하늘(天)은 타이르듯이 그것을 명(命)할 수 없다. 일부러 하지 않는다. 하늘(天)의 목구멍과 혀가 도심(道心)에 위임해 있다. 도심(道心)의 경계하고 알리는 바는 황천(皇天)이 명(命)을 통해 경계하는 바이다. 타인이 듣지 못하는 바이나 자기는 홀로 자세히 듣는다. 속이지도 않고 엄하지도 않다. 고하는 듯하고 가르치는 듯하다. 어찌 다만 타이를뿐이겠는가. 일(事)이 불선(不善)하면 도심(道心)은 그것을 부끄러워한다. 부끄러워하는 것은 천명(天命)에서 타이르는 것이다. 행함에 불선(不善)함이 있다면 도심(道心)은 그것을 부끄러워한다. 뉘우치고 한탄하는 것은 천명(天命)에서 타이르는 것이다. 『시경(詩)』에서 이르기를 ‘하늘(天)의 백성을 깨우침은 질나발과 같고 피리와 같다.’ 이것의 일컬음이 아니겠는가. ‘상제(上帝)에게 제사지내는 방법 중 하나는 마음에 있다.’ 또한 이것으로써 옳다. 길흉을 예언하는 책에서 천명(天命)을 구하는 것은 이단(異端)의 허황된 재주이다. 본심(本心)에서 천명(天命)을 구하는 것은 성인(聖人)의 밝게 하늘을 섬기는 배움이다.
<원문>
〇道者自此至彼之路也。率道心而前進。殀壽不貳。止於所止者。謂之道也。斯道也。生而起程。死而後到。任重致遠。非斯之謂歟。今人以經綸御世。謂之行道。試問自己所適。茫然不省。玆之謂不知。玆之謂失路者也。令天下之人。咸遵率性之道。方可謂之行道。
<직역>
도(道)라는 것(者)은 이쪽(此)부터(自) 저쪽(彼)에 이르기까지(至)의(之) 길(路)이다(也). 도심(道心)을 따르(率)면서(而) 전진(前進)한다. 일찍 죽(殀)든 오래 살(壽)든 변하(貳)지 않(不)는다. 머무르(止)는 곳(所)에서(於) 머무(止)는 것(者) 그것(之)을 도(道)라 이른(謂)다(也). 이것(斯)이 도(道)이다(也). 태어나(生)면서(而) 기정(起程)한다. 죽(死)은 이후(而後)에 이른(到)다. ‘임중(任重)하고 멂(遠)에 이른(致)다.’ 이에(斯) 그것(之)을 편안한 기운(歟)이라 이르(謂)지 않(非)는다. 금인(今人)은 경륜(經綸)으로써(以) 어세(御世)함 그것(之)을 행도(行道)라 이른(謂)다. 자기(自己)가 가(適)는 바(所)를 시문(試問)한다. 망연(茫然)하고 불성(不省)한다. 이때(玆) 그것(之)을 부지(不知)라 이른(謂)다. 이때(玆) 그(之)를 실로(失路)한 사람(者)이라 이른(謂)다(也). 천하(天下)의(之) 사람들(人)으로 하여금(令) 모두(咸) 솔성(率性)의(之) 도(道)를 좇(遵)는다. 방가위지(方可謂之) 행도(行道)이다.
<해석>
도(道)라는 것은 이쪽부터 저쪽까지 미치는 길이다. 도심(道心)을 따르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일찍 죽든 오래 살든 변하지 않는다. 머무르는 곳에서 머무는 것을 도(道)라 이른다. 이것이 도(道)이다. 태어나면서 길을 떠나고 죽은 이후에야 이른다. ‘임무가 막중하고 먼 곳에 이른다.’ 이것을 편안한 기운이라 이르지 않는다. 지금 세상의 사람들은 조직적으로 계획하는 일로 천하를 다스리는 것을 도(道)를 행한다고 이르는데 자기가 갈 곳을 시험하여 물어서 아무 생각없이 멍하고 사물이나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면 이때 부지(不知)라 이르고 길을 잃은 사람이라 이른다.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솔성(率性)의 도(道)를 좇도록 한다면 과연 도(道)를 행한다고 이를만 하다.
<원문>
〇辛未錄曰天賦我性。授之以好德讀作善之情。畀之以擇善之能。此雖在我。其本天命也。凡人認作自己本性。所以慢之。不遵道心之所告戒一番推究。認得此性本係天賦。玆乃赫赫天命。違此性之所欲。行此性之所愧。此是慢天命逆天命。罪通于天矣。故曰尊德性。
<직역>
『신미록(辛未錄)』에서 말하기(曰)를 “하늘(天)이 내(我) 성(性)을 준(賦)다. 호덕(好德)[읽기(讀)를 선(善)으로 한(作)다.]의(之) 정(情)으로써(以) 그것(之)을 준(授)다. 택선(擇善)의(之) 능력(能)으로써(以) 그것(之)을 준(畀)다. 이것들(此)이 비록(雖) 나(我)에게 있(在)다. 그(其) 근본(本)은 천명(天命)이다(也). 모든(凡) 사람(人)은 자기(自己) 본성(本性)에서 비롯함(作)으로 인식한(認)다. 그것(之)을 업신여기(慢)는 까닭(所以)이다. [도심(道心)의(之) 고계(告戒)하는 바(所)를 좇(遵)지 않(不)는다.] 일번(一番) 추구(推究)한다. 이(此) 성(性)이 원래(本) 천부(天賦)와 이어짐(係)을 알(認)아 깨닫(得)는다. 이때(玆) 비로소(乃) 천명(天命)이 혁혁(赫赫)한다. 이(此) 성(性)의(之) 하고자하(欲)는 바(所)를 어기(違)고 이(此) 성(性)의(之) 부끄러워하(愧)는 바(所)를 행한(行)다. 이에(此) 이것(是)이 천명(天命)을 업신여기(慢)고 천명(天命)을 거스름(逆)이다. 죄(罪)가 하늘(天)까지(于) 통한(通)다(矣). 그러므로(故) 말하기(曰)를 덕성(德性)을 높인(尊)다.”
<해석>
『신미록(辛未錄)』에서 말하기를 “하늘(天)이 내 성(性)을 준다. 덕(德)을 좋아하는 [선(善)으로 읽는다.] 정(情)으로 주고 선(善)을 고르는 능력으로 준다. 이것들이 비록 나에게 있지만 그 근본은 천명(天命)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 본성(本性)에서 비롯한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그것을 업신여긴다. [도심(道心)의 타일러 훈계하는 바를 좇지 않는다.] 한 번 추구하면 이 성(性)이 원래 하늘(天)이 준 것임을 깨닫는데 이때 비로소 천명(天命)이 빛난다. 이 성(性)의 하고자하는 바를 어기고 이 성(性)의 부끄러워하는 바를 행하면 이것이 천명(天命)을 업신여기고 천명(天命)을 거스르는 것이니 죄가 하늘(天)까지 통한다. 그러므로 덕성(德性)을 높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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